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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씨 Nov 20. 2020

나의 연인이 나의 죽음을 막았다.

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연애02

때는 추석이었다. 코로나가 다시 유행하면서 내가 서울에 타고 다니던 버스 노선을 확진자가 이용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병원에 내원을 할 수 없었다. 일이 바빠서 시내에 나가서 약을 처방받아 오기도 힘들었다. 그 무엇보다도, 이만하면 괜찮을 것 같다. 약이 없어도 잘 지낼 수 있다는 내 그릇된 생각 때문에 일이 커졌다.


46킬로가 되어 살이 쪘다고 생각했다. 무작정 굶으면서 살이 빠지길 기다렸고, 44킬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마른 것 같지 않은 내 모습이 싫었다. 밤에는 다시 현실 같은 꿈을 꾸기 시작했고, 우울감이 나를 덮쳐왔다. ‘죽고 싶다’ ‘나는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많이 나빠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약을 조금 먹지 않았다고 해서 바로 상태가 나빠지는 나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결방법은 내가 죽는 것이었다.


나는 연인의 과거사가 궁금하다. 내가 없었을 때에도 잘 지냈는지, 어떤 점들 때문에 다른 옛 연인과 힘든 시간을 거쳤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내 연인은 과거의 인연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고 했다.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내가 죽기로 결심하고 난 뒤, 바로 든 생각은 ‘역시 숨기길 잘했다.’는 생각이었다. 병적으로 죽고 싶어 하는 나를 이해하기 힘들 테니까, 이런 모습은 안 보여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내가 죽고 나면 내 연인은 슬퍼하리라는 생각과, 연인은 옛 인연이 궁금하지 않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역시 헤어져야 하는구나. 싶었다. 연인은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몰랐다. 내가 힘들다고는 이야기 하긴 했지만, 업무가 많아서 힘든 줄로만 알고 있었다. 다정한 나의 연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헤어지자고 했다.


그 날 저녁엔 정말 죽을 요량으로, 여태 처방받은 진정제와 수면제, 수면유도제를 모조리 꺼내 일렬로 늘여놓아서, 내가 몇 배의 용량을 먹어야 치사량이 될지 생각했다. 수면제 세알을 먹고 흐릿해지는 정신으로 연인에게 말했다. 너는 전 연인들이 궁금하지 않다 했고, 더 이상 나도 궁금하지 않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고 곧바로 깨어나고 싶지 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나는 일어나서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이었고, 연인은 ‘와서 이야기하자’라고 했다. 나는 짐을 싸들고 출발했다. 어떻게 말을 하지, 다 말해야 하나, 그러면 날 싫어하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를 만났더니 그는 힘들었다는 나를 위해, 추석에 집에 가지 않은 나를 위해 추석 차례상이라며 떡과 약과, 과일을 두 개씩 싸들고 왔다. 하나는 정이 없으니까 두 개여야 한다고 했다.


많이 힘들었냐는 말에, 차마 또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던 나는 요즘 잠들기가 힘들었다고, 병원에 안 갔더니 또 안 좋아져서 너무 힘들었다고 이야기했다. 또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다 이야기를 못했을 뿐. 그는 갑자기 헤어지자는 소리에 놀랐다고, 네가 자는 동안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는지 생각해봤다고 했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네가 잘못한 건 없노라 이야기했다.


힘들지 마라고 이야기하던 그는 같이 전어를 먹자고 했다. 사실 나는 회를 아주 좋아하진 않는다. 내가 먹기엔 비싼 음식이라고 생각했고, 평소에 즐겨먹는 음식도 아니고, 시끌벅적한 술집 분위기가 나는 횟집도 썩 좋아하진 않아서다. 하고 싶은 게 없었던 나는 그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횟집에 갔다. 전어를 먹으면서 문득 든 생각은, 이 사람, 어제도 전어를 먹었다.


전어를 먹었는데 또 먹고 싶냐고 물어봤더니, 그런 건 아니라고, ‘네가 못 먹어봤잖아.’라고 대답했다. ‘가을이니까 전어를 한 번 먹어봐야지.’라는 말에 내가 지금 이 사람이랑 가을을 함께 보내고 있구나. 싶었다. 당장 죽을 계획만 머릿속에 가득 찼었는데, 고소한 전어 한 점 한 점에 서늘한 가을 날씨가 그제야 살갗으로 느껴졌다. 말이 나오지 않고 계속해서 눈물만 핑 돌았다.

그는 전어 무침을 우물거리며 겨울에는 대방어를 함께 먹으러 가야 한다고 했다. 그렇구나. 겨울까지 버텨서 이 사람이랑 함께 대방어를 먹어야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방어 먹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어떤 생선인지 궁금하다고 했다. 남자 친구도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나도 대방어 맛이 기억이 안 난다고, 같이 먹어봐야겠다.라고 했다. 해야 하는 게 하나 늘어난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내 인생에 그는 대방어를 먹으러 가야 한다는 과제를 던져줬다. 아무런 큰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겠지만 나에겐 아주 크게 다가왔다. 겨울까지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그날 저녁, 혼자 목욕을 하고 그가 남겨놓고 간 떡과 약과를 먹으면서 행복하다고, 이만하면 잘 지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어서 그런가, 앞으로는 잘 챙겨 먹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날 챙겨준 그에게 고마웠고, 헤어지자고 했는데 화내지 않고 날 달래준 그에게 고마웠다. 그다음 날 집에 와서 늘여놓은 진정제를 다시 알약통에 넣고, 잘 버텨 나갔다.


그 주에 병원에 다시 내원해서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비로소 말을 꺼냈다. 참 많이 안 좋았었는데, 남자 친구랑 같이 있으면서 괜찮아졌다고도 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했다. 함께 있으면서 웃는 내 모습이 마치 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원장님은 내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같이 있으면서 즐거울 수도 있는 거라고, 항상 우울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하루하루를 버텼고, 코 끝이 시리고 아침이면 서리가 어는 초겨울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나의 연인이 나의 죽음을 막았고, 연인은 그걸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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