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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씨 Mar 25. 2021

개천에서 난 이무기

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과거

나는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얼마나 가난했느냐면, 학생 때 문제집 살 돈이 없었다. 집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고등학생 때 저녁까지 급식을 먹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교복이 꽤 비쌌다. 엄마는 언니의 교복이 작은 나를 뚱뚱하다며 입학한 뒤 일 년 내내 탓했다. 교복이 이렇게 멀쩡한데 너는 이걸 입을 수 없다며 짜증을 냈다.


나는 가난한 게 싫었다. 나의 기회와 가능성을 가난이 좀먹는 거 같았다. 이 가난은 엄마 아빠가 무능한 탓이라고 여겼다. 나는 유능한 사람이 되어 이 구렁텅이를 어서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다.


고등학교 1학년  전교 100 정도를 했었다. 언니도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성적을 부모님은 불만족스러워했다. 아빠는 나에게 이것밖에 못하느냐고 구타를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했다. 나는 집에 들어갈  없어서 술에 취한 아빠가 잠들 때까지 아파트  꼭대기  계단에 앉아 기다렸다. 아빠는 우리 집의 제왕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도와줄  없었다. 나는 매일마다 7 아파트의 꼭대기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떨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불행의 끝은 어차피 죽음일 텐데, 그냥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싶었다.


가난한 내가 대한민국의 교과과정을 거치면서 할 수 있었던 건 공부밖에 없었다. 다른 것들은 시도조차 해볼 수 없었다. 나에게 다른 재능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가장 저렴한 방법으로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었던 건 공부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했다. 나는 공부를 잘해서 돈을 잘 버는 직업을 가지고 싶었고, 돈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겠노라 다짐을 했다. 그 뒤로 성적은 계속 올랐고, 나는 전교에서 손꼽을 정도의 성적을 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은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다. 대학생이었던 언니도 차비가 없어 학교 수업을 못 들을 지경이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나 때부터 EBS 교재가 수능에 지출되었다. 학교에서 수업할 때 비교적 저렴한 EBS 교재를 쓰니 나도 문제집 사는 비용을 세뱃돈으로 충당할 수 있었다. EBS 강의도 있어서 학원에 못 가는 나는 다행스럽게도 강의를 무료로 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넘쳐나는 사교육의 한 복판에서, 나도 남들처럼 학원에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한 달에 20만 원이 넘는 학원비를 어떻게 낸단 말인가. 그래서 눈을 들이게 된 것이 한창 유행했던 인터넷 강의 수강이었다. 매년 초에 30만 원을 내면 10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이었다. 10 강의면 1년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무척 강의를 수강하고 싶었다. 강남의 유명한 선생님의 수업을, 나도 들어보고 싶었다.


돈을 쓴다는 건 아주 큰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3주 정도를 고민해서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30만 원짜리 강의를 듣고 싶다고 했다. 엄마 아빠는 노발대발했다. 그렇게 비싼걸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이거면 1년 동안 들을 수 있다고, 나 학원에 안 가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겨우 허락을 받아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인터넷 강의는 인터넷으로 결제를 해야 하는데, 우리 집 식구들 중 그 누구도 인터넷 결제를 할 줄 몰랐다. 내가 듣고 싶었던 인터넷 강의는 무통장 입금을 지원해주지 않았다. 무조건 카드 결제를 해야 했는데, 버스 탈 돈도 없었던 우리 집 사람들이 인터넷 결제를 할 줄 알리 만무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보며 아빠는 기어코 화를 냈다. 소리를 지르며 이런 건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하고 싶다고 했다. 아빠는 나한테 학생이 벼슬인 줄 안다. 고 했다.


고객센터에 전화를 하고 나는 결제를 가까스로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을 보내고, 나는 수능을 치고 대학에 합격했다. 대학에 합격하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이제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으니 나는 좀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또 공부로 등수가 나뉘었다. 나는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한 학기에 책값만 50만 원에서 100만 원이 들었기 때문에 일을 해야 했다.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과외를 했다. 타지에서 생활하는 생활비도 들었다. 숨만 쉬면서 사는 데에도 돈이 들었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만 모여있다 보니, 대부분  사는 친구들이었다. 사랑도 받고, 사교육도 받고, 크면서  어려움 없이  지냈던 친구들이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그들과 나를 비교했고, 나는 불행한 학부 시절을 보냈다. 대학을 다니며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잘나 봐야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할 순 없구나. 나의 가난은 내 발목을 붙잡고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나를 괴롭히겠구나.


멋진 직장을 가지게 되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또 극심한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어차피 죽을 거,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싶었다. 이만하면 이뤄 놓을 거 다 이뤄 놨는데, 더 이상 인생을 살아가며 무언가 경험해보고 싶지 않았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나는 더 이상 삶을 견뎌내야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개천에서 난 '이무기'가 됐다. 아직 팔자를 뜯어고치고 용이 되진 못했지만, 그래도 사람 구실 하며 살 수 있으니 이무기 정도가 적당할 거 같다.


식구들은 개천에서 난 이무기를 붙잡고 늘어지고 있다. 좋은 게 있으면 효도가 따로 없으니 집에다 보내라 했고, 내 신용 카드를 달라고 했고, 차도 달라고 했다. 부모님 각자에게 30만 원씩 드리던 용돈을 10만 원으로 줄였더니 돈을 못 번다며 돈은 잘 벌어야 한다고 했다. 내 학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사람들인데, 낳아주고 키워준 값을 요구하고 있다.


이무기는 어차피 하늘로 승천하진 못하니까, 이렇게 발끝을 붙잡고 늘어지는 게 아닐까 싶다.


공부를 그래도 남들보다 잘했었던 것 덕분에 지금은 괜찮은 직장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지내고 있다. 취직이 어렵고 돈 벌기 힘든 세상에서 참 잘 된 일이다. 오늘 죽니 내일 죽니 하던 내가 사람 구실 하며 사회생활을 한다는 게 대견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다.


내가 쓸 돈을 내가 벌며 치료를 받다 보니 남들과 비교하는 것도 줄어들었고, 과거의 일에 상처 받은 것을 들추지 않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내 삶은 공허하지만, 그래도 눈을 감고 잠들었다 깨어나는 게 이전처럼 괴롭지 않다.


상처가 아물진 않았다. 10년 가까이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우울증 치료를 받으며, 돈을 벌며 하루아침에 나아질 리 없다. 나는 아직도 집에 들어가지 못해 쭈그려 앉아있었던 아파트 계단의 감촉이 생생하다. 공부하는 게 벼슬이라던 말은 아직도 생각난다. 퉁퉁 부어오른 상처는 꽤 아프다. 콩콩 뛰는 맥박이 상처에서 느껴질 정도니까. 그렇게 아파하다가 이제 적응이 된 게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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