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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씨 Jul 02. 2021

나는 남자 친구가 있는데, 날 좋아한다고요?

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연애

얼마 전의 일이었다. 업무상 거래처 직원들을 만날 일이 잦지는 않은 편이다. 항상 만나던 사람들만 계속 만나곤 했는데, 거래처 직원 한 명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몇 주 동안 다른 사람이 방문했다. 나이가 나보다 많아봤자 몇 살 많으려나, 젊은 축이었던 그 영업사원은 성격도 밝고 친절했다. 회사에서 막내인 나는 입고된 물건을 같이 검수받고, 사무실에 없는 물건들은 발주를 넣느라 연락을 했고, 변동 사항이 있을 땐 또 전화를 했다. 내적 친밀감이 조금 쌓였다고 해야 하나, 같이 일하기 번거롭고 힘든 사람은 아니어서 좋았다.


시간이 흘러서 새로 온 영업사원이 돌아갈 때가 왔다. 물건을 가지고 온 그는 오늘이 이 회사에 마지막으로 들리는 날이 될 거라고 했다. 그러냐고 아쉽다고, 그래도 거래처 한 곳 줄면 더 편하시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저는 일이 줄어들면 좋더라고요.' 하니 영업사원은 '다른 건 뭐 좋아하세요?'라고 되물어왔다. 아무런 생각 없이 신나서 대답했다. '산책하는 거도 좋아하고, 커피도 좋아하고, 집에서 만화영화 보는 것 도 좋아하죠.' 그 사람은 깔깔 웃더니 또 되물어 봤다.

 그러면 저랑 같이 산책도 하시고, 커피도 마시고, 같이 만화영화 보실래요?

순간 깜짝 놀란 나는 죄송하다고, 남자 친구가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분도 실례했다고 곧장 사과하셨다. 평소에 SNS에 남자 친구 있는 걸 남들에게 보여주질 않아서, 내가 혼자 지내는 줄 아셨나 보다.

흔하게 같이 영화 보자, 밥 먹자, 하는 게 아니라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내가 같이 해보고 싶다는 말이 다정하게 느껴졌다. 나는 첫 연애를 참 오래 했다. 남자 친구랑 헤어지고 나서는 백수였기 때문에 별 다른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다. 평소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적었고, 친구들을 만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취직을 하고 지금의 남자 친구를 바로 만났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나한테 '좋아함'을 표현하고 자기랑 만나자고 시도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내가 살면서 이런 말을 들어보는구나 싶었다.


우울증을 앓으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건 세상 모두가 싫지만, 그중에서 제일 싫은 건 나 자신이라는 거다. 나는 한심한 내가 싫고, 살찐 내가 싫고, 머리가 곱슬인 내가 싫고, 예쁜 집에서 살지 못하는 내가 싫고, 예쁜 옷을 입지 못하는 내가 싫다. 나는 누구보다 나를 잘 알기 때문에 내가 정말 싫다. 그런데 생전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일주일에 두세 번 고작 10분씩 만나고선 나를 좋아한다고, 같이 만나자고 한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같이 하자는  말을 듣고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숨이 컥 막혔다. 공황이었다. 아주 기쁘고 두근거려서 그런  아니었다. '당신이 나에 대해  안다고 그렇게 말할  있어요?'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리고 너무 놀랐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는 일은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보였다는 뜻이니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내가 아주 못난 사람은 아니었구나, 싶어서  괜찮았다.


집에 돌아와서 오늘 있었던 일을 되짚어 봤다. 다른 사람이 날 좋아한다는 사실에 기뻤다. 사람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원한다. 결국에는 혼자 사회를 헤쳐나가야 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려야 하고, 혼자 죽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사랑을 찾아다니고, 반려동물과 함께 지내고, 화목한 가정을 꿈꾼다.  


하지만 우울증과 공황장애 치료를 지속적으로 받는 나는 이제는 알고 있다.  누구보다 내가  좋아하고 믿어줘야 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의 믿음과 지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해줘야 한다.


그때쯤이면 나도 치료가 끝나겠지. 많이 호전되었다고 생각하는 지금까지도 이렇게 다른 사람의 사랑으로 나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고 있었다.


나는  남자 친구를 많이 사랑한다. 가끔 싸우기도 하고, 남자 친구 때문에 우는 날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날들 모두가 내가 남자 친구를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사건들이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싸울 필요도 없고,  마음을 몰라주는 것에 대해서  필요도 없다.


남자 친구는 매일같이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해주고 내가 밥은 먹었는지 오늘은 잘 잤는지 물어봐주는데, 낯설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연정에 놀랐다. 많이 미안했다. 매일 같이 네 입에서 나오는 너의 사랑한다는 그 말이 사실 더 놀랍고 신비한 것인데, 내가 너무 익숙하고 무심해져 있었나 보다.


아직까지도 남자 친구에겐 차마 말하지 못했다. 내가 더 많이 좋아해 주고, 그만큼 나도 나 자신을 더 사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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