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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씨 Apr 08. 2022

주식부자가 된 ‘전남친'

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연애

나는 같은 학과에서 과 cc를 오래 했다. 거의 학창 시절 내내 연애를 했었으니까. 그때의 나는 불안정했고, 어렸다. 그래서 좋은 기억도 있지만 나쁜 기억도 많고, 서로에게 서툴게 굴다가 상처도 많이 주고받았다. 나이를 먹고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해서 조금씩 생각이 자리 잡을 때쯤 우리는 헤어졌다.


헤어진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전 남자 친구는 나에게 집에서 자녀를 돌보며 가정 주부가 되길 원했다. 세상에 그런 좋은 제안을 거절했어?’라는 소리를 가끔 듣긴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첫 번째로 나는 아이 낳기가 싫었다. 나는 유년시절부터 자라오면서 겪었던 생각과 경험들을 나만 겪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부모에 대한 선택권 없이 세상에 태어난다. 나는 자녀가 선택하고 싶은 부모가 될 자신이 없다. 험난하고 매몰찬 세상을 겪는 건 나 혼자 만으로도 충분하다.


두 번째로, 아이를 낳고 싶은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원래 나이 먹으면 결혼하고 결혼하면 당연히 아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라는 입장이었다. 나는 아이 낳기 싫은 이유를 수백 가지 댈 수 있는데, 본인은 그냥 그게 순리니까 하고 싶어 했다. 지금이야 ‘그래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라고 여기지만, 그 당시의 나는 그게 본인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는 생명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전혀 없고 순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자녀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세 번째로, 잘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한평생 그럭저럭 잘하는 게 없었다. 돈 없고 능력 없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은 공부였고 그나마 공부를 어느 정도 해냈기 때문에 학교도 가고, 직장도 얻었다. 그런데 그런 내게 그나마 잘 해왔던 공부를 다 포기하고 가사 노동을 하라고 했다. 나는 그 일을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가정 주부였던 엄마가 돈 한 푼 못 벌어오는 아빠한테 빌빌 거리면서 맞고 지내는 걸 계속 봤다. 내가 경제권과 사회적인 권력이 있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걸 포기하라고 했으니, 하기가 싫었다.


어쨌든 헤어지자고 하고 나서 4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들에 대해선 나쁜 기억도 있고 좋은 기억도 있다. 내 주변 친구들은 ‘그 나쁜 놈의 새끼’라고 아직도 이야기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은 ‘내 인생의 한 부분을 그래도 같이 보냈는데, 잘 지냈으면 좋겠다.’이다. 매우 뛰어나게 성공하진 않았으면 좋겠고, (배 아프니까) 그렇지만 그렇다고 아주 구렁텅이에 빠지지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평범하게 잘 지냈으면, 본인이 원했던, 나랑은 함께 꾸려나갈 수 없었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분기마다 한 번 정도 ‘그래 걔가 내 인생에 있었던 사람이었지?’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갈 때쯤, 대학 동기와 만났다. 나는 아주 특이한 직무에 종사하고 있어서 내가 하는 일을 궁금해하는 친구들도 많고, 다른 사람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이라 본인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해서 연락하는 친구들도 몇몇 된다. 어쨌든 내가 있는 읍단위 소도시까지 찾아와 줬으니 반갑게 맞이하고 같이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그런데 동기가 말했다. ‘ㅇㅇ이 있잖아. 걔 주식으로 대박 났대.’


한창 학생 때도 월급 벌어서 부자 되긴 힘들다고 투자가 답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우리는 학생 때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 수 있어서 2,000만 원짜리 마이너스 통장으로 졸업반부터 주식을 시작했던 친구였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나서 주식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자산이 대폭 불어나 친구들에게 말한 돈만 3억이 넘는다고 했단다. 경기도에 아파트도 한채 샀다는 이야기는 덤이었다.


동기는 말했다. ‘너 어차피 그렇게 오래 만나다가 헤어질 거였으면 조금만 더 참고 뭐라도 받지. 너무 배 아프잖아. 돈 없고 학생이라 능력도 없는데 그렇게 고생했는데 아깝지 않냐’라고 했다. 친구한텐 웃으면서 ‘그러게 차 한 대 뽑아줬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이야기했다. 친구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너는 이렇게 됐는데도 후회하거나 배 아프지 않아? 나 같았으면 그냥 애 하나 낳아주고 가정주부 했어.’라고 물어봤다.


글쎄 어디에 투자했는지 종목은 좀 알려줬으면 좋겠긴 하다.


하고 크게 웃어넘겼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친했던 동기의 결혼식에 가서 '전남친'을 만났다. 20대에 억대 자산가가 되었지만 내가 보기엔 별 변함은 없어 보였고, 인사하고 잘 지내느냐는 말을 주고받았다. 내가 정신과에서 진료를 받고 있는 걸 아는 사람이라 ‘요즘 몸은 어떠냐’고 물어봤고, 괜찮다고 많이 나아졌다고 회사도 잘 다니고 있고 여기 사람들도 좋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나도 가족들은 다 잘 지내시느냐고, 별 탈 없으시냐고 물어봤고 ‘다들 괜찮게 잘 지낸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러고 집에 돌아오고 나서 전화기에 불이 났다. 평생 연락 없던 사람들이 연락 와서 ‘다시 만나?’라고 물어봤다. 나랑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은 내게 긴밀한 이야기도 전해왔다. ‘야 사람들이 그러더라. 너도 돈이 아쉬운 거 아니냐고 그러더라.’ 나는 대답했다. ‘그래 그랬구나.’


예전 같았으면 사람들이 나를 속단한다며 펄펄 뛰고 속상해했을지도 모르겠다. 우울증 약을 먹으면서 가장 크게 변화한 점 중 하나가 이점이다. 바로 감정의 폭이 굉장히 좁아진 것이다. 기쁠 때도 아주 크게 기쁘진 않고, 슬플 때도 아주 크게 슬프지 않다. 감정의 진폭이 작아지면서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 내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적어졌다. 그래서 이번 사태도 누가 뭐라고 하든 간에 ‘응 그랬구나.’ 하고 넘겨 버릴 수 있었다.


항상 불행했던 나였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잘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보면서 나의 불행을 빗대어 나는 이것밖에 안된다며 나를 또 갉아먹었다. 그런 내가 억대 자산가가 되어 잘 먹고사는 전 남자 친구를 보며 그냥 상황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 너는 그렇게 사는구나' 싶었다. 경제적인 풍족함이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적어도 그립지는 않았다.

무뎌진 건지, 성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엔 지금 남자 친구랑 만난 지 2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코로나 사태 때문에 한 달은 못 만나고 있었어서 그런가, 오랜만에 따뜻한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니는데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같이 볕 좋고 바람은 선선한 남산 둘레길을 걷다가 예쁘게 꾸며놓은 꽃밭을 발견했다. 함께 쭈그려 앉아 올망졸망한 봄꽃을 바라보며 향기가 좋다고, 마스크 사이로 이렇게 좋은 꽃향기가 난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주식으로 부자가 되지도 않았고, 다른 동기들보다 돈도 적게 번다. 아직 회사 기숙사에서 얹혀살고 있고, 매달 월급 받아 근근이 살고 있다. 그래도 나는 지금이 좋다. 돈이 많다고 행복한 건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무조건 불행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래도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 거 보면 '근근이 먹고살만하면 돈이 많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나 보다.'싶기도 하다.


퐁퐁 터지는 개나리를 배경 삼아 손을 잡고 같이 거닐었던 그 길이 행복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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