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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씨 Feb 10. 2022

투뿔 한우를 데쳐 먹을 뻔 한 사연

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치료일지

나는 나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한 대학생 때부터 집에 갈 땐 맛있는 걸 조금씩 사갔다. 우리 집은 가난해서 난방도 제대로 때지 못하는 정도였다. 그런 집에다가 새로 나와서 맛있다고 하는 과자도 사가고, 백화점 지하에서 줄 서서 사 와야 하는 빵도 사갔고, 엄마 아빠 생일 때는 맛있다고 소문난 케이크도 사갔다. 내가 선뜻 이런 것들을 살 형편이 되서가 아니었다. 다들 이런 것들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 한 번쯤 경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재작년 여름, 청년 구직활동 지원금을 받을 때였다. 한 달에 50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이 내게 들어왔고, 나는 그 돈의 조금을 떼어다 집에다 먹을 것을 보냈다. 삼겹살도 보냈고, 복날엔 치킨도 시켜줬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인터넷에서 그 당시 귀하고 비싸고 맛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샤인 머스캣을 발견했다.


나는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비싼 과일이었다. 2.5kg 한 박스에 5만 원이 훌쩍 넘는 가격이었다. 100g당으로 계산하니 100g에 2,500원 남짓이었다. 이 포도는 얼마나 맛있길래 삼겹살보다 비싼 걸까,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 포도를 집에다가 보냈다. 우리 집 식구들은 이런 거 구경도 못해봤을 테니까, 좋은 거 한 번 이럴 때 먹어보면 어떨까 싶어서였다. 나는 혼자고, 집에는 세 사람이 있으니까, 나 혼자 만족하는 것보단 세명이 만족하는 게 더 나은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다가 포도를 보냈다고 말하고 엄마의 전화를 기다렸다. 고마웠다. 맛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비싼 포도니까, 분명히 맛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오후 엄마의 전화가 왔고 나는 조금이나마 설레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포도는 잘 받았는데, 이게 청포도네. 껍질 채 묵는 건 농약을 치사서 영 별론데...' 하셨다. 고맙다고 우리 딸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예상과 달라 짜증이 확 올라왔다. '그래서 맛은 있어? 그거 국산 청포도야' 했더니 엄마는 '그래 희한하게 이게 망고 맛이 나더라' 하시고는 전화를 끊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었던 걸까?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큰 법이니까. 내 분에 넘치는 걸 식구들에게 베풀어서 속상한 거고, 내가 더 나은 상황이었으면 넘어갈 수 있었을까? 싶었다.


가장 크게 느낀 건 우리 집이 다른 집들보다 덜 행복한 이유가 마냥 재화의 부족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우리가 '이것 밖에' 못 사는 데에는 식구들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었다.


사람이 한 명 잘 자라나기 위해선 생각보다 많은 것이 필요하다. 지속적인 관심, 인성을 가꿀 수 있는 교육, 건강 관리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부모님이 돈이 부족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을 다 주지 못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부모님에겐 돈 말고도 부족한 점들이 있었구나, 싶었다.


그 뒤로도 이런 일은 계속됐다. 엄마 아빠 생신 때는 항상 신발을 사드렸다. 신발은 한 켤레에 10만 원 남짓 하니까 우리 집 식구들은 절대 제 돈 주고 좋은 거 사서 못 신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신발 매장에 가서 신발을 꼭 신어보고 편한 신발을 사다가 가져갔다. '좋긴 좋은데 무릎이 흔들리는 것 같다.' '좋긴 좋은데 겨울에 너무 춥다. 부츠가 있으면 좋겠다.' 이야기를 몇 번 들었다.


언젠가 아빠 생신 때는 집에 청소기가  고장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30평이 넘는 집을 비질로 청소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가 막혔다. 그래서 아빠 생신 선물로는 집에다 무선 청소기를 보냈다. 그리고 그날 아빠에게 전화가 와서 '청소기는 참 좋은데 현금도 주면 안 될까?'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이 이후로 무엇이든 간에 우리 집 식구들에게는 선뜻 베풀지 않겠다고, 집에는 되도록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이번에도 설날이 되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또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 집에는 제대로 일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제일 막막한 건 부모님 자신 들일 것이다. 어디 창피해서 말도 못 하겠다며 돈이 없어 힘들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엄마 아빠 용돈 없느냐고 했다. 안쓰럽긴 했지만 나 혼자도 먹고살기 힘들다고 하고 말았다.


숨이 막혀서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도망치듯이 집에서 나와서 혼자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래도 명절인데 맛있는 거 먹어야 하는데 싶어서 집에 전화를 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느냐고 언니에게 물어봤더니 고기를 좋아하는 언니는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엄마가 샤부샤부를 해서 먹자고 하는데 그 고기는 맛이 없다고, 맛있는 고기를 먹고 싶다고 했다.


연휴에도 문 연 고깃집을 찾아서 소고기 한 근을 샀다. 맛있는 거 먹자 싶어서 투뿔 한우를 한 근 샀다. 포장해서 나오려는데 문득 '한우는 기름져서 영 별론데' '이게 누구 간에 기별도 안 가는데 이게 이만큼이나 하느냐' 하는 목소리가 귓전에서 맴돌았다. 그래서 정육점 사장님께 말씀드렸다.


이거 가격표 안 보이게 포장 새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10만 원어치 투쁠 소고기 한 근, 2만 5천 원짜리 딸기 한 바구니를 사고 집에 돌아가서 싸서 사 왔다고 했다. 소고기는 호주산이라고 했다. 수입이라서 싸서 사 왔다고 했다. 소고기를 본 엄마는

샤부샤부 할라 했는데 이거도 마 다 데쳐 무글까? 


하셨다. 투뿔 한우를 육수에 데쳐 먹다니, 허걱! 등에 털이 곤두섰다.


엄마, 이왕 구워 먹는 고기 사 왔는데 마 구워 먹자.


그렇게 투뿔 한우 갈빗살과 부챗살, 치마살은 잘 구워져서 우리 집 식탁에 올랐다. 소고기를 먹는 식구들은 연신


그래 요즘 호주 고기가 이래 맛있데. 한우 못지 않다!


하며 드셨다. 생색내려면 이때 딱 이게 한우라고 밝혀야 했지만, 무슨 핀잔이 들려올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아무 말하지 않았다.


집으로 올라갈 때 엄마는 큰어머니가 홈쇼핑으로 시켜주셨다는 갈비탕을 한 팩 싸주셨다. '이거 큰엄마가 보내셨는데 갈비탕에 아무것도 안 들어있고 육수도 무슨 다시 육수 같아서 영 별로더라' 했다. 나는 엄마한테 웃으면서 '이거 받았는데 고맙다고 인사는 드렸어?' 했다, '아니 아직 안 했지...' 하시는 엄마한테 '그래 나중에라도 잘 먹었다고 인사라도 드려야 안 되겠나~' 하고 도망치듯이 집에서 나왔다. 집에서 나오니 숨통이 좀 터졌다.


어제 사무실 옆자리 사람이 나에게 딸기 한 팩을 주셨다. 반차를 내고 오전에 잠시 농수산물 시장에 다녀왔다고, 딸기 먹어보라고 참 맛있다고 하셨다. 감사하다고 하고 다음날 출근해서 나는 너무 맛있더라고, 올해 딸기를 덕분에 처음 먹는다고, 감사하다고 했다. 딸기를 주신 분도 그렇냐고 다행이라고 하셨다. 우리 집 식구들이 못 하는 감사 인사만큼,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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