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치료일지
회사에 취직하고 나서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해보고 있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없는 읍단위의 작은 동네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에 혼자만의 여가시간을 누릴 수 있는 몇 없는 기회라 여기며 지내고 있다. 최근엔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테니스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다름이 아니라 회사 테니스 동호회에서 동호회에 들어오면 테니스 레슨비를 일정 수준 지원해주겠다는 게시글을 보고 나서였다. 테니스 동호회에서 섭외한 선생님과의 1:1 수업은 주 3회 20분씩이었다. 이 정도의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운동을 한다니! 괜찮겠다 싶어서 냅다 동호회 가입신청서를 냈다.
여기에서 잠깐 말하자면 나는 운동을 정말 못한다. 못한다 못한다 소리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창피해서 운동을 하기도 싫어했다. 특히나 구기종목처럼 움직이는 물체를 대상으로 한 스포츠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중학생 때 체육 선생님은 못 가르쳐줘서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연거푸 하셨을 정도였다.
그런 내가 돈을 내고 (얼마 안 내긴 했지만) 스포츠를 배워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결과는 처참했다. 몇 개월째 하고 있지만 코트 위에는 선생님의 한숨만이 가득할 뿐이다.
연세가 지긋하신 우리 테니스 코치님은 '의미 없는 거짓말을 해봤자 실력은 늘지 않는다.'며 매번 나에게 수고했지만 진전이 없다고 하시곤 한다. 어느 날이었나, 선생님께서 내 다음 타임의 사람을 가리키며, '저분은 온 지 한 달만에 저렇게 친다.'라고 하셨다.
집에 되돌아와서 선생님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주눅이 들었다. 역시 나는 운동을 잘 못하는구나 싶었다. 노력을 입력했지만, 출력 값이 마땅치 않은 게 속상했다. 그렇게 땀을 흠뻑 흘린 몸을 씻어내다 문득 이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 못하는 것도 해보고 있네.'
초등학교 방학 때, 엄마가 나를 수영 학원에 보낸 적이 있었다. 여자 애들은 멘스 하기 전에 해보는 게 좋다. 00이는 살이 쪘으니까 수영이 살 빼는데 좋다는 주변 아주머니들의 말을 듣고 나서였다. 나는 수영장이 좋았다. 넓고 햇빛도 들어오고, 바닷가 앞에 있었던 수영장 창문을 열면 뜨거워진 백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특유의 모래 향기가 났다.
그렇게 수영을 배우다가, 학부모를 초청하여 수영 수업을 참관하는 날이 있었던 것 같다. 엄마가 수영장에 오셔서 내가 수영하는 걸 봤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 내가 의지하는 사람이 와있어서 신났었다. 그날 저녁 엄마는 더 이상 나를 수영 학원에 못 보내겠다고 했다. 내가 너무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수영을 너무 못했기 때문에 학원에 들어가는 돈이 아깝다고, 하나도 못하는 걸 어떻게 돈 들여 가며 계속 배우냐고 했다. 그때 조금 울었던 것 같다. 그리고 창피하기도 했다.
그 뒤로 나의 유년기는 항상 '잘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공부를 잘해야 했다. 공부를 잘해야 엄마 아빠처럼 가난하고 불행하게 살지 않을 것 같았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외모를 잘 가꾸려고 했다. 예쁘고 멋진 외모는 세상 만천하에 공개된 초대장과 같았다. 고만고만하게 학력이 비슷한 대학 동기들 사이에서 외모로 편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옷을 잘 입기 위해, 나를 잘 꾸미기 위해 노력했다. 취직을 하고 나선 일을 잘하기 위해 노력했다. 인정받고 싶었고, 나 자신의 가치를 높여서 더 많이 벌고 싶었고, 나라는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싶었다.
이렇게 내 인생은 '잘하는 것' 위주로 돌아갔다. 나에게 투자되었던 재화와 관심은 내가 못하는 것들을 개선시킬 수 없었다. 나는 못하는 것들을 고이 땅에 묻어놓고 잘하는 것이라도 잘해야만 했다. 그랬던 내가 못했고, 못하고 있고, 못할 것 같은 테니스를 배우고 있다. 그것도 즐겁게.
물론 발전이 있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있어야 한다. 스트레스와 압박은 발전의 계기가 된다. 나도 물론 테니스 잘 치고 싶다. 그렇지만 테니스를 못 치는 나에게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테니스를 배우는 도전을 한 내가 자랑스럽다.
돈 버는 어른이 되어서 평생 못해볼 것 같은 걸 해보고 있구나!
얼마 전엔 제주도에 출장을 다녀왔다. 일을 하고 나서 저녁에 남는 시간에 해수욕장에서 서핑을 배워봤다. 배웠다기보다는 체험을 해봤다. 10번 중에 한 번 정도만 겨우겨우 일어나 해안가에 밀려올 수 있었다. 보드에 매달려 선생님께 여쭤봤다.
'잘하거나 못하거나 하는 걸 보시면 어떠세요? 저는 당연히 이왕 하는 거 잘하고 싶은데 잘 안되네요.'
선생님께선
'저희는 매일 하는 일이라 정말 아무 생각이 없어요. 못하면 못하는 거고 잘하면 잘하는 거죠 뭐.'
라고 하셨다.
그렇다. 못하는 건 아무 상관없다. 나는 서핑도 테니스도 잘 못한다. 그렇지만 못하는 걸 해보는 내가 조금은 좋은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