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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7할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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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씨 Aug 24. 2023

난생처음으로 다녀온 여름휴가

이 좋은걸 이제야

나는 제대로 휴가를 다녀온 적이 없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사글세에서 살았고, 나는 버스를 타고 문제집을 살 돈이 없었다. 항상 술에 취해있던,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운전을 할 줄 알았던 아빠는 우리를 데리고 외식이나 외출을 하지 않았다.


대학생 때는 악착같이 아르바이트며 과외를 하고 돈을 모아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글쎄 그건 휴가라고 하긴 좀 그렇고, 이때 아니면 못 가본다는 절박한 마음가짐으로 돌아다녔던 것 같다. 나는 성인이 되기 전에는 한 번도 못해봤으니까, 지금은 할 수 있을 테니, 여러 가지 경험을 해봐야 한다는 강박이었던 것 같다. 사실, 그때 제대로 된 겨울 잠바가 없어서 추위에 벌벌 떨면서 눈물을 삼키며 돌아다녔던 기억이 선명한 걸로 봐선 그렇게 행복하고 멋진 기억은 아니다.


돈을 버는 직장인이 되고 나서도 푹 쉬는 휴가는 그림의 떡이었다. 학위를 병행하는 나는 항상 바빴고, 일은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지금 해두지 않으면 언젠가의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이었기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게 겁이 났다. 매달 저축과 투자를 하고 나면 남는 돈으로 항상 빠듯하게 지내왔기 때문에 거금을 들여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부담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항상 학회 행사를 휴가로 삼고 다녀오곤 했다. 여태 일했던 것들에 대한 초록을 작성하여 포스터를 제출하고 부스에서 설명을 드리고, 회사에서 꾸린 부스에서 설명도 하고, 그러고도 남는 날이 있으면 쉬고 맛있는 것도 먹곤 했다. 출장비가 정액으로 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 좋은 숙소에 머물면서 잠도 푹 잤다. 그게 내 휴가의 전부였다.


올해는 남자친구와 같이 여름휴가를 가기로 했다. 가족들과 같이 거주 중인 남자친구는 가족들과 함께 여행이나 휴가를 다녀오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이번 여름에는 여름휴가를 가지 않을 예정이라고 둘이서 다녀오자고 했다. 그렇게 금토일 2박 3일의 여행 일정을 잡고 놀러 다녀오기로 했다.


나의 첫여름 휴가지는 강원도로 정해졌다. 별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운전해서 방문하기 편했고, 거리도 괜찮았고, 가격도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첫날에는 같이 워터파크에 가봤다. 워터파크가 난생처음이었던 나는 신나게 미끄럼틀을 탔다. 물놀이도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이었던 것 같다. 서늘한 강원도의 기온에 중간중간 따뜻한 온탕에서 몸을 녹이며 물놀이를 했다. 물놀이를 마치고 석양을 바라보며 숙소로 돌아와 치킨을 시켜 먹었다. 이렇게 맛있는 치킨이 있다니! 물놀이 후에 먹는 밥이 너무 맛있었다. 치킨을 먹다 리조트에서 진행하는 불꽃놀이도 감상했다. 반짝이는 불빛과 폭약이 터지는 소리에 가슴도 함께 뛰었던 것 같다.

다음날엔 같이 리조트 주변의 숲길을 걷고, 내부 헬스장에서 운동도 했다.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갈 땐 항상 근처의 절에 다녀왔다는 남자친구의 말에 근처 절에도 다녀왔다. 소원을 매단 연등에 사슴벌레가 붙어있었다. 산골짜기의 계곡물이 내려오는 소리와 멋진 사슴벌레를 감상했다. 밥 먹으러 들린 식당의 사장님이 야생화 군락이 볼만하다 하셔서 야생화 산책길도 걸었다. 엉덩이가 통통한 꽃등에가 가득한 곳이었다. 날이 조금 흐려 검푸르게 변한 숲길에서 한참 풀벌레 소리를 앉아서 들었다.

마지막날엔 근사한 호텔 조식도 먹었다. 조식 코너 한편엔 퍼서 담을 수 있는 딸기맛, 녹차맛, 초코맛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아침부터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지만 키가 닿이지 않아 슬퍼하는 어린아이들에게 도와줘도 괜찮을까? 하고 물어본 뒤 아이스크림을 연신 퍼줬다. 아이들은 나에게 고개 숙여 감사합니다 하고 이야기해 줬다. 내 인생에는 없었던 다정한 어른으로 잠깐이라도 기억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구불구불한 국도를 따라서 집에 왔다. 항상 출장을 가든, 여행을 가든, 나는 집 밖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집에 다시 돌아오고 싶어 했다. 바깥은 너무 피곤하고 신경 쓸게 많았다. 나는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모든 여행의 종착지는 집이라고 말하고 다니곤 했다.


그런데 이번 휴가는 달랐다. 정말 좋았다. 아쉬웠다. 더 있고 싶었다. 다음에도 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차 트렁크에 실을 수 있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까, 먹고 싶은 걸 사 먹을 수 있는 돈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밤새워 포스터를 만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까 생각하다 내린 결론은 바로,


이 정도 휴식을 취해도 곧바로 일상으로 돌아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게 지낼 수 있는 여력이 되기 때문이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며칠 쌓여도 내가 결국에는 다 해낼 거라는 나에 대한 믿음, 내가 비싼 숙소에 묵어서 돈을 쓰더라도 내 생활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버스를 탈 700원이 부족하지 않아서, 업무를 다 해낼 수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푹 쉬다가도 다시 마음을 다잡고 가기 싫은(누구나 일은 하기 싫기 마련이다) 곳에 갈 수 있어서.

사실 이런 나의 모습이 모난 곳이 동글동글 펴지는 것보다는 흐르는 물살에 깎여나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 자신을 지워내고 맞춰나가는 게 아닐까 하는 약간의 불안감, 그렇지만 이런 평화를 느낄 수 있다면 썩 나쁘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적당한 긴장감과 적당한 평온함 그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 아마 평생 동안 연습해도 죽을 때까지 미완성일 나와 나 사이의 싸움이 아닐까 한다.


다음 여름에도 평화로운 여름휴가를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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