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 주(酒)저리 주(酒)저리-2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행사가 끝났다. 전 세계의 많은 정상들과 기업 대표들이 우리나라에 머물며 다양한 회의와 만찬에 참석했다. 이번 주요 만찬과 홍보 행사에는 여러 전통주가 사용되었다. 전통주가 만찬주로 쓰인 것은 최근 침체한 전통주 시장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전통주의 사용은 양조장에는 영광이지만, 동시에 전통주가 세계무대에 소개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국제회의나 외교 만찬에서의 술 선택은 단순한 음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품격과 문화의 깊이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과거 한국은 공식 행사에서 외국산 와인이나 샴페인을 건배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최근에는 다양한 전통주와 한국 와인이 국내 정상회담이나 국가 행사에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와 달리 해외 공관이나 문화원에서의 전통주 사용은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최근 몇 년간 우리 전통주 산업은 이전과는 다른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 막걸리, 약주, 증류식 소주 등 전통주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청년 양조인과 스타트업이 합류하면서 새로운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SNS를 중심으로 한 ‘지역 양조장 투어’, ‘한식 페어링’ 같은 문화적 접근도 활발하다. 그러나 아직 국내 전통주 시장은 협소하고, 대중 소비층은 제한적이다. 일부 지역축제나 박람회를 제외하면 일상적으로 전통주를 접할 기회도 많지 않다. 이런 현실 속에서 전통주의 새로운 활로로 해외 진출이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해외에서의 전통주 인지도는 아직 미미하다. 그렇기에 전통주를 알릴 수 있는 다양한 국가별 맞춤 홍보가 더 요구된다.
한식이 전 세계적으로 흥행하는 가운데, 전통주는 한식과 함께 해외에 알려야 할 우리의 음식 문화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맥주나 소주가 생산되고 있지만, 이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술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불고기나 김치찌개 같은 음식이 ‘맛’을 통해 한국을 알린다면, 술은 음식에 어울리는 음료로서 ‘조화’를 보여준다. 특히 지역마다 다른 누룩과 원료를 사용하는 전통주는 그만큼 다양한 향과 맛을 지니며, 한민족의 음식 문화를 설명해 준다. 따라서 해외 공관의 공식 만찬, 문화원 개원 행사, 한식 주간(K-Food Week) 등에서 전통주가 활용된다면, 그것은 단순히 술을 제공하는 차원을 넘어 한국의 미식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가 될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사케, 프랑스의 와인, 중국의 고량주들은 자신들의 전통주를 ‘외교의 언어’로 활용해 왔다. 일본 대사관들은 현지에서 사케 강연과 시음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한다. 프랑스 대사관의 경우 ‘Tasting France’ 같은 프랑스 와인 소개 행사를 열고, 주재국 대사관 주최의 와인 디너와 시음회에서 이를 소개한다. 이 밖에도 많은 나라가 대사관, 문화원, 무역 투자 기관이 협력하여 시음회, 강연(전문가, 소믈리에 초청), 비즈니스 매칭(수입사, 레스토랑 연결), 문화 행사(음식, 음악과 결합) 등의 형태로 자국 술을 홍보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관 간 긴밀한 협업이 핵심 수단이 된다.
이러한 사례는 술이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국가의 품격’을 나타내는 문화 외교 수단임을 보여준다. 한국의 외교 현장에서는 아직 전통주가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정부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올해 재외공관 행사에서 우리나라 전통주를 선보이며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서기로 했다. 특히, 한식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했지만, 전통주를 아는 외국인은 여전히 많지 않다. 그렇기에 재외공관 행사에서 우리 전통주를 적극적으로 알리겠다는 방침이다.
사실 해외 공관이나 문화원에서 전통주를 일상적으로 제공하고, ‘한식과 전통주의 페어링 행사’, ‘전통주 클래스’ 등을 열면 그 자체가 가장 효과적인 홍보 무대가 된다. 이를 통해 양조장에는 실질적인 수출 기회가, 외국 소비자에게는 한국 문화의 깊이를 경험할 수 있는 창구가 마련될 것이다. 한국의 해외 공관은 이미 다양한 문화 교류의 중심지로서, 미술품 전시, K-pop 공연, 한복 체험 등 여러 콘텐츠를 통해 한국의 이미지를 전파하고 있다. 그러나 식문화 부문에서는 아직 통합적인 전략이 부족한 실정이다. 문화원에서는 단기 체험 프로그램이나 한식 쿠킹 클래스와 연계해 ‘전통주 테이스팅 세션’을 상시 운영한다면, 한식의 문화적 파급력은 훨씬 커질 것이다.
무엇보다 전통주를 외교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기반이 필요하다. 현재 정부는 ‘전통주 진흥법’을 통해 양조 기술과 산업 육성을 지원하고 있지만, 문화외교 차원의 전통주 활용 지침은 아직 미비하다. 해외 공관 행사에서 국산 전통주를 공식 만찬용으로 지정하는 규정을 만들거나, ‘올해의 공관 전통주 리스트’를 마련해 국가 차원에서 품질과 품격을 인증한다면 전통주 산업의 신뢰도는 한층 높아질 것이다. 더 나아가 외교부와 농림축산식품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협력해 ‘전통주 해외 문화 보급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면, 단기적 홍보를 넘어 지속 가능한 산업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주는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 속에서 한식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발전한 음료(술)이자 음식이다. 술 한 잔에는 한국인의 정성과 철학이 스며 있다. 따라서 해외 공관의 건배주로, 문화원의 체험주로, 전시회의 환영주로 전통주가 오를 때, 그 술은 ‘한국의 이야기’를 전하게 된다. 이제 우리도 해외 공관과 문화원에서 전통주를 알릴 때다. 그것이 우리의 술 문화가 세계 속에서 당당히 제 자리를 찾게 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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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술에 게재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