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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수,열수,경강 그리고 한강 – 열일곱번째

어서와! 서울 이곳은 처음이지?_1

 

여행코스 : 마포역 - 마포대교- 광흥창 - 공민왕사당 - 절두산 순교지 - 망원정 - 월드컵경기장역


  한강길 하류에 위치한 지역중에 중요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마포입니다. 마포나루를 통해 물자교역이 이루어지고 세곡선이 머물면서 주변에 세곡을 저장하던 창고가 있었던 곳이자 민간 장빙업이 시작된 곳이 마포나루 일대입니다. 한강길 아홉 번째 코스는 마포일대를 돌아봅니다. 마포의 경제와 상권이 어떻게 발달되었는지 그리고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는 물류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기에 많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한강길 9코스는 마포역에서 출합니다. 그리고 마포전차종점비를 거쳐 마포대교 아래 한강수변공원길을 따라갑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조선과 근대역사책에서 보았던 사건의 장소를 지나쳐갑니다.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다는 것신 신기하게 느겨질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책에서 보아왔던 주한 외국인 주인공들을 만나는 계기가 될 것이라 봅니다. 한강길 9코스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밤깊은 마포종점갈곳없는 밤전차..     


 마포역 4번 출구로 나와 왼편 도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전차모양의 화장실을 갖춘 조그마한 공원에 다다릅니다. 공원의 이름은 복사꽃공원이며, 복사꽃은 복숭아나무의 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곳 동네 이름도 도화동입니다. 천상의 열매라고도하며, 손오공도 천도를 몰래 먹었다가 부처님 손바닥에 갖혀버리기도한 과일이 복숭아입니다. 옛 문헌에는 과실이 익어가는 계절에 맛볼 수 있는 과실이었기에 행복과 부귀를 상징하였고 귀신을 쫓아낼수 있는 힘을 가진 과실이라고도 하여 신장대로도 사용했습니다. 게다가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관우,장비 세명은 복숭아나무 아래서 도원결의를 맺었는데 이처럼 여타 과실 나무에 비해 복숭아 나무는 신성시하거나 의리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복사꽃공원에는 이러한 이유를 반영하듯 한 처녀와 아비의 동상이 서로 마주보며 세워져 있습니다. 옛날 이곳에 아름다운 처자가 아버지만 보시고 살았다고 합니다. 미모가 출중하여 옥황상제의 눈에도 뜨이게 되어 옥황상제의 부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시집보낸 아버지는 혼자 있기 적적하였겠죠. 그런 모습을 본 옥황상제가 복숭아나무를 주고 키울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나무를 심어 복숭아를 키웠다고 하는데 그곳이 여기 도화동이었다고 합니다. 도화동은 예전부터 자연산 복숭아 나무가 많았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에는 도화내동이라 하였고, 용산에서 넘어오는 고개를 용산고개 또는 복사골이라고 불리웠습니다.      


 복사꽃공원을 나서 맛있는 냄새로 가득메운 골목을 지나 불교방송국 빌딩 뒤편길로 갑니다. 석불사 맞은편에 작은 공원이 있는데 여기를 경유하여 한강수변공원으로 내려갑니다. 옛 노래중에 ‘밤깊은 마포종점! 갈곳없는 밤전차~~’ 라는 노래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겁니다. ‘마포종점‘이라는 은방울자매가 불렀던 노래인데 발표된 시기가 1968년도입니다. 그해에는 마포와 돈의문을 운행하던 전차운행이 중단된 해이기도 합니다. 마포에 밤낮으로 운행하던 전차가 더 이상 운행하지 못하고 전차기지에 머무는 모습이 너무나 아쉬워서 노래로 만든게  아닐까 합니다. 서울의 전차는 1899년 처음 설치가 되었으며, 명성왕후의 묘가 있는 홍릉으로 편리하게 이동하기 동대문에서 홍릉까지 연결된 전차가 최초입니다. 이후 1907년 경에 마포와 돈의문을 잇는 전차가 부설되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운행해오다가 자동차 통행이 많아지면서 전차 운행을 중단하게 됩니다. 서대문까지 운행하던 전차의 종착점을 추정해보면 도로변에 서있는 불교방송국 빌딩 자리가 옛 전차 종점이었으며, 이곳에서 3.1만세운동을 위해 운집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마포쪽에 전차가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마포가 상업적인 포구로는 제법 컸기 때문입니다. 마포까지 전차가 연결된 이후 사대문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전차노선이 생기며 동쪽으로는 왕십리까지 이어집니다.      

 

    (이미지 1 전차노선도)

     (이미지 2서소문로 전차)     


  마포나루가 얼마나 컸는지 알려면 나루터를 부르는 명칭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루는 강이나 바다에서 사람이나 물건을 옮기는 장소를 지칭하는 말로 한자로 표현할 때는 작은 포구는 나루 또는 도(渡), 이보다 큰 나루는 진(津)이라 하고, 조금 큰 것을 포(浦), 대규모의 바다 나루는 항(港)이라고 하였습니다. ‘진‘은 세곡이나 국가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받기위한 나루터 기능이었고, ’포‘는 상업적인 기능이 더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강 주변에서 ’도(渡)‘가 들어간 나루는 삼전도가 있으며,  ’포‘가 들어간 나루는 찾아보면 영등포, 개포, 두모포 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에 해당하는 곳은 어디가 있을까요? 지난번에 거쳐온 노량진뿐만 아니라 앞으로 지나갈 예정인 양화진, 마포 위쪽에 용산진, 광진, 송파진, 동작진 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곳은 예전에 나루터가 있었던 곳이였고 앞서 한강길을 걸으면서 보아왔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구분하여보면 마포라는 곳이 제법 컸을 거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마포는 큰 나루가 아니여서 상업중심지도 아니였고, 주요기능은 한강진 위쪽 두모포가 중심 포구 역할을 했었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마포로 중심포구 역할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한 이유가 한강은 바다와 인접해 있기 때문에 밀물때가 되면 바닷물이 두모포나 잠실까지 올라왔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강에 모래톱이 쌓여 더 이상 위쪽까지 밀물이 올라오지 못하고 마포 인근까지만 밀물이 올라왔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배를 타고 쉽게 올라올 수 있는 최종지역이 마포인 셈입니다. 큰 배가 올라올 수 있을 정도로 수심이 깊었던 것도 다른 이유 중 하나입니다. 게다가 마포 남쪽의 밤섬이 파랑을 막아 주고 여울이 없었기 때문에 유속이 일정하고 큰 배가 정박하여 물건을 싣거나 내리는 것이 유리하여 다른 포구보다 유리했습니다.      

경조오부도 - 한강주변의 포구 및 간선도로가 표시되어 있다.


 또한 마포는 서해안과 연결하는 양화진이 지척에 있었고, 한강 상류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해로 부터는 어물이 많이 들어와 생선, 건어물, 젓갈, 소금 등의 해산물이 집하되는 곳으로 유명으며, 삼남지역의 미곡, 한강 상류지역의 나무 등을 실은 배가 마포로 몰려들다보니 상거래가 활발한 포구이자 상업지역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세곡선이 모여드는 서강나루와 용산나루가 지척에 있어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시설이 많다보니 운반 및 관리하기위한 인부들도 많았습니다. 이처럼 마포를 중심으로 주변에 여러 기능을 가진 포구가 맞물려 있고, 한양으로 연결하는 이동로가 그나마 편하였기에 마포포구는 지리적으로도 유리했습니다. 서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3주’라 하여 객주, 당주, 색주가 많았다고 합니다. 객주는 상거래와 상품을 보관하고 숙박을 해결하던 곳이고, 당주는 배를타고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이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당집, 즉 제사하는 곳이고, 색주는 술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에 마포가 상권이 큰것도 이러한 지릭적인 이유때문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많다보니 여러 사건들도 많았는데 기록에 살인, 강도, 세곡 탈취사건 등이 빈번했다고 합니다.     

 예전의 마포나루(이미지 3)



한강에 밤섬을 폭파하라밤섬과 서강대교     


 마포종점비 맞은편 한강으로 연결되는 길을 따라 나섭니다. 한강변에 다다르면 건너편에 여의도가 보이고 그 앞에 작고 낮은 섬이 보이기도 합니다. 한강을 따라 오른쪽 하구방향으로 내려가면 처음으로 만나는 대교가 있습니다. 빨간색 아치로 만들어진 이쁘장한 다리가 서강대교입니다. 그 아래에는 밤섬이라는 철새 휴식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서강이라는 말은 서강나루가 있었던 강줄기 부분을 불렀던 한강의 다른 이름입니다. 강물이 잔잔하게 흐르기 때문에 서호(西湖)라고도 불리웠으며, 이처럼 한강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웠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에 해당하는 구간을 경강이라고 불렀는데 중랑천합수부가 있는 두모포와 양화진 사이가 한성부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한강이라는 명칭은 본래 서울의 남산 기슭, 지금의 한남동 앞의 강을 일컬었습니다. 여기에 있던 나루를 한강나루라는 뜻으로 한강진이라고 불리웠습니다. 한강나루는 도성의 정남에 위치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강 맞은편은 사평나루로, 고려 때는 사평도 또는 “사리진”이라 했습니다. 조선시대 제일의 나루터로 판교를 지나 용인 · 충주로 통하는 영남대로의 관문입니다. 조선 초기부터 이곳에는 별감이 파견되어 인마의 통행을 기찰하고 관선 10~15척을 관리하고, 조선 후기에는 진을 설치하여 훈련도감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남대교가 있는 이곳은 남도지방으로 내려가기 위한 관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두모포가 있었던 곳은 서호에 반해 ‘동호‘라고 불리웠고, 잠실이 있었던 곳은 신천, 송파강으로 불리웠습니다. 지금은 발원지부터 시작하여 북한강과 남한강으로 구분하지만 예전에는 자기가 살던 곳 앞에 부분만 부르기 편하게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시대에 따라 고려시대에는 ’열수’라고 불리웠고, 삼국시대에는 ’아리수’ 또는 ’욱리하’라고 불리웠습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한강을 부르는 이름은 더 세분화되어 불리웠지만 결국은 크게 보면 경강이라고 보면 됩니다.


  서강대교가 있는 이곳은 예전에 서강나루가 있었고 황해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등에서 배를 타고 올라온 세곡이 내려지는 곳이 였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여러 창고가 있었고, 그 중에 하나가 나중에 만나게될 광흥창터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서강나루에서 조세곡이 모이다 보니 세금을 걷는 ‘공세청‘과 공미를 검사하던 ‘점검청‘ 도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확인이 이루어진 세곡은 용산진이나 양화진, 서강나루 위쪽에 광흥창과 도성 안으로 이동하여 보관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쌀이 화폐를 대신하였기 때문에 대동법에 따라 쌀로 세금을 받았던 것입니다. 광흥창에서 보관하던 세곡은 관리들의 급여로 사용하였는데 초기에는 분기별로 지급하던 것을 숙종때 매월 지급하는 것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지금에 월급처럼 쌀을 받아서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서강대교 아래에서 봉원천 위쪽 나들길을 통해 나서면 신수동인데 옛 지명이 신수철리(新水鐵里)입니다. 즉 새로운 수철리 마을이라는 뜻인데, 수철은 무쇠를 일컫는 말이여서 이곳에는 농기구 등을 만들거나 국가에 바치는 철기구를 만드는 대장간이 많았다고 합니다. 순 우리말로 ’무쇠막’인데 금호동의 옛 지명도 수철리였습니다. 결국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진 동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강대교를 벗어나기 전에 한강쪽에 보이는 낮은 벌판같은 섬을 보고가야 합니다. 밤알처럼 생겼다고해서 밤섬(율도)입니다. 예전에는 사람이 살던 곳이였으며, 조선초기 한양천도 후 모든 세곡이나 물자가 한강으로 몰리면서 배름 많이 이용했습니다. 이를 수선하고 새로운 배를 만들 필요가 있었는데 밤섬의 주민들은 배를 만들고 수리하는 조선업을 통해 생업을 이어갔습니다. 1968년까지 밤섬에는 약 62가구 정도가 살았었는데 한강과 여의도 개발을 위해 방죽을 쌓을 필요가 있어 골자재 확보를 위해 밤섬을 폭파하여 그 석재로 여의도일대 제방을 쌓게됩니다. 밤섬에 살던 사람들은 마포구 창전동으로 이주하였고 밤섬에 존재했었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부군당’ 건물 또한 현재 창전동으로 이전하여 빌라 사이 깊숙한 곳에 세워져 있고 지금까지 마을의 안녕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창천부군당의 모습 - 도심 속에 방치하듯이 보존되어 있어 찾아가기 쉽지 않다.)


  옛 밤섬의 모습은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매우 아름다웠다고 하지만 지금은 모습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옛 사진을 보면 홍수에도 잠기지 않은 밤섬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몇몇 건물이 보일 정도로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밤섬은 자연경관지역으로 정해져 있어 사람이 접근할 수 없습니다. 한강개발로 10 여개로 쪼개졌었던 밤섬은 한강 상류로부터 내려오는 토사가 쌓여 지금에 밤섬이 되어 하나로 붙어 있습니다.게다가 밤섬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들어갈 수 없지만 철새들은 여기에 보금자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밤섬위로 지나가는 서강대교에는 가로등이 없는데 밤섬에 서식하는 철새들이 편하게 쉴 수 있게 하기위한 배려입니다.     

     1960년대  밤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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