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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수,열수,경강 그리고 한강 - 열여덟번째

어서와! 서울 이곳은 처음이지?_2


 마포구 일대는 창고와 세곡선 등 배들이 운행이 많았던 곳입니다. 그래서 넓은 지역에 포구뿐만 아니라 각지역과 연결된 대로가 놓여있기도 합니다. 그 자리에 예상하지 못한 사당이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도 주요 다리가 우선적으로 세워진 곳이 마포일대입니다. 예나지금이나 중요한 지리적 강점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서강나루가 있었던 서강대교를 벗어나 한강 인근 동네를 경유하여 지나갈 것입니다. 대동미를 비축했던 광흥창과 창고를 지켜주었던 공민왕 사당을 만나게 됩니다.       

   


 녹봉을 받으러 줄을 서던 곳광흥창과 공민왕사당     


 서강대교를 나서 토정로를 가로질러 가면 광흥창터에 세워진 광흥당이 있고, 그 옆에 공민왕 사당이 있습니다. 앞에 보시는 것처럼 여기는 광흥창이 있었던 자리 이기도 합니다. 광흥창은 앞서 서강대교에서 얘기한것처럼 세곡선이 모여서 확인하고 각각의 창고로 이동한다고 했습니다. 광흥창은 관리들의 급여를 지급하던 창고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쌀을 급여로 지급했는데 이를 ‘녹봉‘이라고 했죠. 조선 전기에는 매년 4차례 지급하였었는데 숙종이후 매월 지급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진정한 월급이 된것입니다. 매월 20일이 되면 문관은 이조에서, 무관은 병조에서 발급하는 녹패를 들고 광흥창에 가면 쌀로 급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광흥창에 저장된 세곡은 대부분은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올라온 쌀을 보관하였고 이 일대 외에 용산 근처에도 창고가 많았고 거기에도 보관하고 관리하는 선혜청도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서 급여를 받은 관리들은 한양으로 가는 길에 필요한 물품을 사거나 팔았는데 그 자리가 숭례문과 서소문 주변에 있었던 칠패시장터입니다.     


 지금은 창고의 모습은 없지만 지명만 남았고 광흥당이라는 문화회관 건물이 생겨 다양한 전통문화와 연계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하 공간에 가면 마포의 옛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옛 사진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광흥당 정문을 바라보며 왼쪽에 보면 작은 사당 건물이 하나 보입니다.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만들어진 사당은 여타의 사당 구조가 측면과 정면이 각각 1칸인데 비 더 넓게 만들어졌습니다. 게다가 공민왕사당은 고려시대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지어긴 사당입니다. 어떻게 조선시대에 이러한 건물이 세워졌을지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조선 초 이곳 일대에 양곡보관 창고를 지으려 할 때 동네 노인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나 「이곳은 전에 내가 자주 찾던 곳이니 당(堂)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준다면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풀려질 것이며 만일 이를 실천하지 못한다면 매년 사고가 날 것이다」라며 계시를 해주었는데 노인이 과연 이 자리에 와보니 공민왕 부부를 그린 영정이 바위 밑 함에서 나왔으므로 그 뜻에 따라 신당을 짓게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제사를 지냈고, 제사에 소홀히하면 창고에 불이 나는 등 안좋은 일이 벌어지곤 했다고 합니다.      


  공민왕은 고려시대 원으로부터 독립하려했던 주권회복을 실행했던 왕이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세도가 보다는 백성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던 인물이였습니다. 말년에 노국공주가 죽고 후사를 이를 아들 우에 대한 세자책봉이 늦어지다보니 정치적으로 외로웠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다보니 말년에 기행적인 일들을 벌이기도했습니다. 예전에 개봉했던 ‘쌍화점’이라는 영화도 공민왕에 대한 일부 얘기이죠. 이외에도 공민왕에 대한 전설이 남아 있는데 몽골 때문에 안동까지 피신하였는데 이곳에서 심기일전하여 다시 개성을 수복하고 이동합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외세를 맞서고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백성들에게는 신처럼 보였을 수 있겠죠. 그래서 안동지역에는 공민왕과 연관된 굿이나 제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소문으로 퍼져 신격화된 공민왕을 민중 또는 백성들이 받아들인것이 아닐까 합니다.     


 공민왕에 대한 재미있는 설화가 하나 더 있습니다. 왜구를 싫어했던 공민왕은 신당 근처에 일본인이 얼씬거리는 것을 용서하지 못해 사당이 생긴 이후 근대까지 일본인들이 근처에 오면 반드시 해코지를 하였기에 일본인들은 쉽게 이근처에 접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얘기를 듣고 「조선강안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쓴 일본인 토목기사 장목(長木)은 이곳 공민왕사당 앞을 찾아왔었는데 갑작스럽 복통으로 기절을 하였는데 꿈 속에 수염을 기르고 금색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물러가라는 호통을 듣고나서 깨어보니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응급실로 데리고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치료를 마친 후 다시 공민왕사당을 찾아가 보니 역시 똑같은 증상이 나타났고, 놀란 나머지 주변의 일본인들에게 그 근처에 얼씬도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사당이 있는 뒷산의 이름은 소가 누워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여 ‘와우산’이라고 불리웠는데 이곳은 땅의 기운이 센 곳이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그 맥을 차단하기 위해 소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을 도로를 내어 끊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사당 뒤편 중앙하이츠 아파트로 가려면 와우산 뒤쪽에서 유일하게 이어진 도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딱 소머리 즈음에 해당이 됩니다.      



전기를 만들어 불을 밝히다당인리 화력발전소     


 공민왕사당을 뒤로하고 들어왔던 길을 따라 상수역 방향으로 갑니다. 이곳은 홍대와 합정의 상권에서 좀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작은 카페와 식당이 즐비한 상수동 거리입니다. ‘나혼자산다’라는 방송을 통해 출연하였을 때 이곳 거리를 지나갔는데 박나래님이 그당시 이근처에 살았었고 많은 곳을 가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곳이 맛집이냐고 물어보니 몇 군데를 찍으며 알려주었던 곳이며 기회가 되면 찾아가보려고 벼르고 있는 곳이 여기 상수동거리입니다. 상수동 식당가를 지나 당인리발전소부터 합정역까지는 이쁜 인테리어로 무장한 카페가 줄지어 도로변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곳을 찾아오려면 4월 초 벚꽃이 피는 날에 와야 제격이며 카페 발코니에 앉아 향기 가득한 커피를 마신다면 최상의 시각적, 미각적 기쁨을 경험할 겁니다. 골목길을 지나는 동안은 여러 음식 냄새가 쉬고가라고 유혹을 합니다. 걷기여행은 걷기만 중요한게 아니라 주변을 둘러보고 쉬거나 맛집에서 식사하고 기분좋게 만드는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걷기여행을 할때는 도시락을 싸가기 보다는 주변에 맛집 식당을 이용하곤 하는데 이러한 이유에서이며 하나 더 이유를 덧붙인다면 골목상권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라는것도 있습니다. 상수동거리를 벗어나면 가로등 너머 높은 건물이 한강을 마주하며 서있습니다.      


  서울에도 아직 화력발전소가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열병합발전소입니다. 당인리 발전소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발전소로써 1929년 경성전기주식회사가 당인동에 석탄 화력 방식으로 건설한 국내 최초의 중앙 공급식 발전소였으며 마을이름을 따서 당인리발전소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건설당시 한강 건너편 영등포일대에 세워진 공업단지에 전기를 공급하기위해 건설되었고 1호기부터 3호기까지 건설하여 47.5MW의 전기를 생산하였고 1961년 7월 한국전력공사가 발족되면서 기존 발전소를 인수하여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에 노후화된 1~3호기를 폐지하고 4,5호기를 건설하여 약 380MW를 생산할 수 있는 시설로 교체하였습니다. 1987년에 기존 4,5호기를 열병합발전시설로 개조하여 운영하다가 노후화에 따라 4,5호기를 폐지하고 신규발전시설을 지하에 매립하는 형태로 공사를 진행하여 2020년부터 발전을 해오고 있습니다. 기존 4,5호기는 서울시에 기부채납하여 문화공간으로 조성하여 2022년에 개장할 예정이며, 새로 짓는것은 복합화력 발전소로 지하에 발전시설을 두고 지상에는 공원화 하여 조만간 공개될 예정입니다. 이곳 발전소는 열병합 발전방식으로 개조되어 발전뿐만 아니라 발생한 열을 지역에 난방용으로 공급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LNG를 연료로하여 발전을 하고 있으나 최초 발전당시에는 석탄을 이용하여 발전을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발전소까지 연결되었던 철로인 당인선이 존재했었고 지금은 노선이 사라져 어울마당로로 변모하였습니다. 신형 복합발전기의 발전용량은 800MW이며 서울시 350만 가구 중 200만 가구에 공급할 수 있는 전력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역사속 인물과의 조우양화진공원과 선교사묘지     


 이곳은 양화진공원입니다. 예전에 양화나루가 있었던 장소입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중에 ‘창궐‘이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기억하시나요? 워낙 짧게 개봉했던터라 모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를 꺼낸 이유는 중국에서 돌아온 현빈이 제물포에서 배를 내려 육로를따라 양화진으로 와서 한양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질병 창궐한 지역이라고 하여 그곳을 지키던 관리가 배를타지 못하게 막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에서 보면 다른 포구에 비해 관원들이 배치되어 있고 드나드는 사람들을 관리합니다. 이처럼 양화진은 나루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지방에서 물길따라 한강으로 들어오는 배들이 지나가고 확인하는 중요 장소이자 서울의 천연 방어선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천연의 방어선이라는 것은 이 주변에 산들이 연결되어 있어 군사요새화 하기 좋은 장소라는 의미이자 멋진 풍경을 가진 장소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조선영조시대에는 나루에 군사적인 목적과 주요간선도로망에 있는 주요 나루가 있었는데 이를 삼진(三鎭)이라고 했고 송파진(松坡鎭)· 한강진(漢江鎭)과 함께 양화진(楊花鎭)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이때 사용한 ‘진’이라는 글자는 나루를 뜻하는 ‘진’ 이라는 글자와 다릅니다. 강화도와 김포, 부평 등 지역으로 가기위해서는 필히 양화진에서 배를 타고 강건너 양천의 양화나루를 거쳐야 했었습니다. 그 위치가 강북쪽은 현재 잠두봉이 있었던 자리 근처이며, 강남쪽은 양천구 선유봉이 있었던 자리에 양화진(또는 양화나루)가 있었다고 합니다. 선유봉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현재 선유도섬이 있는 곳이거나 양화한강공원에 있는 선착장이 있는 곳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선유도가 남쪽 백사장터와 붙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이후 한강개발 과정 중 석재 채취를 위해 선유봉이 채석장으로 변하였고 없어지게 됩니다. 생각보다 한강에서 없어진 섬이 좀 있죠. 이보다 더 있는데 그건 다음 기회에 얘기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옛 양화진의 풍경화 속에서 선유봉을 볼 수 있습니다.

 

 

 양화진이 역사 속에서 떠오른 것은 한강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아요. 마포에서도 얘기했듯이 한강은 민물때 바닷물이 올라와 배를 운행하기 쉽게 했었죠. 조선 후기에는 한강에 토사가 쌓이면서 민물이 올라가는 최대 위치가 마포였는데 이 때문에 큰 배가 다닐 수 없었고 양화진이 더 중요하게 보였던 거죠. 한강에서 만나는 첫 나루였으니까요. 그래서 어영청을 설치하고 군사 100여명이 주둔했고, 관리용 배가 10여척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양화대교가 생기면서 나루의 기능은 없어졌고 이름은 남아 있습니다. 양화대교는 1965년에 건설되었는데 일찍 만들어졌다는 것은 교통의 요지이거나 나루의 기능을 대체할 필요성이 시급해서였을 겁니다. 그래서 제2한강교라는 이름으로 개통되었고, 확장을 거쳐 1984년에 양화대교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양화진 일대는 또다른 목적으로 역사의 장에 이름이 올라옵니다. 서빙고나 동빙고가 어떤것인지 알고 계시나요? 그렇죠. 얼음을 채취하여 보관하던 국가 소유의 창고였습니다. 그렇다면 민간인들은 얼음을 채취하지 못했을까요? 아닙니다. 민간인들도 얼음을 채취하고 빙고를 만들어 사빙고 영업을 하였었는데 그 중심지가 양화진과 망원 일대 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얼음을 채운채 생선을 운반하던 배가 있음으로해서 한양에 신선한 해물, 어패류를 공급할 수 있었습니다.

 


  양화진 공원 뒤편에 가면 외국인 선교사묘지공원이 있습니다. 근대 국사책에 보면 외국인 선교사를 통해 교육이나 의료기술이 전파되었죠. 초기에 활약했던 선교사들은 어디에 잠들어 있을까요? 네 맞습니다. 뒤편에 보이는 선교사묘지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역사책에 보아왔던 선교사중 우리가 친숙하게 알고 있던 배제학당과 이화학당을 세운 선교사 뿐만 아니라 해외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소개했던 베텔가족과 딜쿠샤의 주인이자 독립선언문을 감추어 외국에 소개한 테일러 가족의 부자묘지도 이곳에 있습니다. 더욱 특이한 것은 외국의 묘지공원 처럼 비석과 비문이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함을 가지고있어 이를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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