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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수,열수,경강 그리고 한강 - 열아홉번째

어서와! 서울 이곳은 처음이지?_3

 한강길 9코스 세번째 입니다. 


 마포를 지나는 구간은 이야기거리가 많습니다. 그만큼 왕래가 잦은 곳이자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에 한강은 매우 넓은 폭을 가진 밋밋한 강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이전에만 해도 전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고 백사장이 널부러져 있고,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이 반짝이는 모래와 주변 낮은 산봉우리가 어우러진 그러한 한강이였습니다. 명나라의 사신이 조선에 찾아왔을 때 한강유람을 보지못하였다면 제대로된 대접을 받지 못한것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강 유람은 중요한 행사장소였습니다. 특히 아름답고 진경산수화의 대가였던 정선도 한강에서 만큼은 여러 그림을 남겼습니다. 특히 한강 하구인 마포-서강-양화진-양천관아가 있던 곳이였습니다. 지금은 양화진의 아름다움은 그림으로만 마주할 수 있으며, 남아있는 지명은 상상을 불러일으켜줄 키워드가 됩니다. 한강길 9코스의 마무리는 양화진 일대를 걸어가는 코스입니다.      

     


평등한 세상을 외치다절두산 천주교 순교 성지     


 당인리 발전소를 지나 카페거리를 따라 내려오면 머리위로 분주하게 달리는 철교밑에 다다릅니다. 오른편에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 및 양화진 관아터가 있고, 오른쪽에는 천주교기념관과 성당이 있습니다. 이곳을 절두산 순교지라고 부릅니다. 원래 이름은 누에가 머리를 쳐들고 있는 형상이라고하여 ‘잠두봉’이라 불리웠으나 천주교 박해때 처형하던 장소로 쓰이면서 ‘절두산(切頭山)‘이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잠두봉은 양화진이라는 강북의 나루가 있었던 장소이자 서쪽 관문 역할을 하던 곳이였습니다. 전망대처럼 높은 봉우리가 있기도 하거니와 밋밋하지 않고 도드라진 풍경을 보여주는 장소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곳은 아름다움 속에 비극이 머문 곳이기도 합니다. 

 1866년 고종 3년인 시기에 제1차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면서 양화나루와 잠두봉의 역사는 변하게 됩니다. 이 해 로즈(Roze)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조선 원정을 시도한 끝에 8월 18일에 양화진을 거쳐 서강(西江)까지 올라왔습니다. 함대는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1866년 9월에 다시 강화를 침략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당시 강화도 정족산성과 문수산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프랑스군을 퇴출시킵니다. 이후 조선은 이 일련의 사건이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에 의한 것으로 이해하였고 프랑스 함대가 정박한 양화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합니다. 이는 프랑스 함대의 침략에 대한 천주교 신자들의 책임을 묻고 백성들이 프랑스 함대와 내통하는 것을 막고자 한 의도였는데 이때부터 잠두봉은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칼날을 받은 곳이라는 뜻에서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의미가 다른 두 개의 이름이 생기게된 연유입니다. 천주교회에서는 1966년 병인 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곳 일대를 매입한 뒤 잠두봉을 중심으로 성당과 순교기념관을 건립하고 사적지로 조성하였으며, 1976년 이래로 한국 성인들의 유해를 옮겨와 안치하였고 현재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지가 되었습니다. 지난2019년 11월에 천주교서울순례길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로마 교황청에서 공식 인정한 동양 최초의 순례길이며 절두산순교지도 순례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한국에서의 천주교는 다른 나라에 비해 신자수가 제법 많습니다. 아마도 천주교를 접한 방식이 달랐기 때문일겁니다. 천주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아시나요? 천주교는 1600년대 천주학 또는 서학이라는 서양의 학문으로 조선에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서양의 학문을 배우고 연구하던 학자와 양반들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진 천주교는 점차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퍼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당파 싸움으로 사회가 혼란스럽고 전염병과 재해가 끊이지 않아 백성들이 살기가 힘들었는데,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천주학은 양반과 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퍼졌습니다. 인간은 양반과 천민으로 나뉠 수 없으며 남녀가 평등하다는 천주학의 기본 가르침은 지배 계층의 횡포와 거듭되는 재난의 고통에 시달리던 일반 백성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학문으로 시작한 천주교는 자체적으로 미사도 보고 세례도 거행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부족한 부분을 메꾸기 위해 스승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중국까지 가서 직접 신부를 만나거나, 바티칸에 공식적으로 사제를 보내달라고 건의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천주교가 서서히 사람들에게 종교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천주교인 중에는 정약용, 이승훈, 이가환 등의 실학자와 양반 부녀자들이 많았으며 1845년에는 김대건이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가 되었고 안성 미리내성지에 김대건신부의 묘지가 있습니다. 천주교가 박해를 받았던 것은 유교의 교리와 매우 달랐기 때문인데, 유교는 충효가 중요시되고 위아래의 순서를 우선시했다면 천주교는 남녀노소 평등하다는 교리였기에 서로 상극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지배계층에서는 평등 논리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겠다고 판단하였을 것이고, 평민들은 평등하다는 말에 변화와 희망의 메시지로 받아 들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박해를 가하게 되었고, 같은 평등사상이라고 서학(천주교) 대신 자체적인 평등사상을 내세운 동학이 발생한 것도 이 시기입니다. 동학은 이후 천도교로 명칭이 바뀌었고 기본사상은 ‘사람이 곧 한울’ 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이기도 합니다. 병인박해 이후 20년이 지난 1886년에 조선과 프랑스가 맺은 조약으로 천주교는 비로소 종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양화대교 변천사2한강교에서 양화대교로     


 현재 양화대교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양화나루는 강북 잠두봉과 강아래 선유봉 아래를 연결하여 운행하였으며 양쪽의 나루에 같은 양화나루(양화진)이라고 불리웠습니다. 지금은 양화대교가 양쪽으로 연결되어 나루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위치의 중요성 때문에 일찌감치 대교가 건설되어 운영되었는데 1965년 1월에 제2한강교로 개통되었고 1981년 11월에 기존다리의 안전확보 및 교통량 확대를 위해 새로운 다리를 추가 건설하여 나란히 붙여진 다리가 되었는데 확장된 후에 1984년 11월 부터는 양화대교로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이후 성능개선을 통해 각각 다리가 일방으로 통행하게 변모하였는데 양평동 방향이 구교(1965년 개통)이며 합정동방향이 신교로 보면 됩니다. 선유봉이 있었던 자리는 올림픽대교가 건설되면서 발파작업을 통해 채석하여 한강변과 여의도 제방사업에 투입되면서 사라졌고, 그 아래에 모래사장은 물길로 변하여 지금에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양화대교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 또 한번의 변신을 합니다. 경인아라뱃길과 연계한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양화대교의 일부 구간을 대형 선박이 쉽게 통과할 수 있도록 교량 중앙의 112m 구간과 이를 지지하던 교각 2개를 해체한 후 로제아치교를 대신 설치하는 구조개선공사가 2010년부터 2011년 말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이로인해 지금에 양화대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큰 배는 다녀본적 없는 한강입니다. 



경교명승첩의 무대망원정과 한강하류     


  양화대교를 지나 유유히 한강을 따라 내려가다보면 너른 광장이 나타나고 오른편 오르막 계단을 올라서면 망원동에 이르게 되는데 강변북로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누각 하나가 살포시 앉아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곳이 옛 망원정이 있었던 곳이며 현재는 없어진 망원정을 복원하여 설치한 누각이며, 멀리있는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망원정은 세종의 형이였던 효령대군이 한강의 풍경을 보며 쉬기위해 만들어 놓은 정자였는데 가뭄이 드는 어느 날 세종이 걱정하던터에 이곳에 올라서니 비가 내려 몸시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이후 세종이 수시로 찾아와 양화진 백사장에서 훈련하는 군사들의 사열을 하기도 했고 시를 짓기도 하였고, 이후 성종의 형이였던 월산대군이 이곳을 얻어 정자를 고쳐 사용하니 성종이 ’망원정(望遠亭)’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1925년 대홍수로 망원정은 유실되었고 근대에 이르러 이 정자를 재건한 것이 현재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의 망원정이 아니라 새로운 망원정인 셈입니다. 망원정이 있었던 이곳과 양화진 일대는 앞서 말했듯이 풍경이 아름다웠던 장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명나라 사신에게 한강 주변을 관광시켜 주는 것은 큰 접대 중에 하나였다고 합니다. 당시 한강의 절경 코스인 양화진과 잠두봉 일대를 도는데 왕실소유의 한남대교 근처에 있었던 제천정에서 거창한 연회를 펼친 뒤 배를 타고 돌고 다시 이곳 망원정에서 마무리 하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풍경은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신들 뿐만 아니라 한양에 사는 서울사람들도 한강에서 뱃놀이하고 풍경을 바라보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한강개발이 되기 전 196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이곳 뿐만아니라 한강에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던 곳으로 지금에 압구정동 두모포, 예전 잠실의 포구였던 삼전도에도 정자나 누각이 많았다고 합니다.      


“ 강위의 배를 살지언정, 강가의 정자는 사지 않으리” - 김정흠 삼연집 3권째     


 게다가 정선이 양천향교에 부임하면서 한강하구 일대의 풍경을 담은 경교명승첩에도 담겨있으며 양화환도(楊花喚渡)의 제목을 통해 양화진 일대의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한강 하구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과 각종 물품이 들어오는 입구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어패류와 소금 등 물품이 많이 올라왔는데 보관과 관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미리 소금에 재워 젓갈이나 자반처럼 염장한 생선류가 한양으로 올려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선한 어류를 맛본다는 것은 가히 쉬운일은 아니였습니다. 장빙은 국가에서 관리하고 운영하였기에 민간에서는 엄두를 못냈기 때문입니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민간에서도 장빙업을 하게되었는데 희우정이 있었던 망원동과 합정동 일대에 축대를 쌓고 빙고를 설치하여 월산대군이 장빙업을 시작한 것이 최초입니다. 민간에서 장빙업을 유행하니 사대부는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고, 채취한 얼음을 사용하여 생선을 보관하기가 유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한강에는 얼음을 채우고 생선을 운반하는 냉장선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한양에서도 싱싱한 생선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냉장선(또는 빙어선)은 매년 음력 3월부터 9월까지 운항하였고 조기 빙어선은 대략 20척, 도미는 22척 ,준치 18척, 민어 30척 정도가 한강에서 영업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근대화 재래시장의 모범망원시장   

  

 망원정 정문을 나와 도로변을 따라 약 10분 정도 걸어가면 최근 TV예능방송에서 많이 소개되었던 망원시장이 보입니다. 이곳은 1975년에 자연스럽게 발생한 마포구내 재래시장 중 하나이며 다른 시장에 비해 소문이 나서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고, 젊은 주인들도 많은 시장입니다. 게다가 시장주변은 작은 점포가 널려있어 경리단에 비유하여 망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이기도 합니다. 여타 재래시장에 비해 망원시장은 다양한 먹거리가 많고 TV에서 소개된곳도 많은 곳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장보기 및 배달서비스도 가능하여 재래시장이 불편하다는 말은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으며, 재래시장도 대형마트 못지않게 변하고 쇼핑이 즐거운 장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본보기 같은 곳입니다. 망원시장을 가로질러 도로를 건너면 월드컵시장이 나타납니다. 같은 선상에있는 시장이지만 앞서 본 망원시장과는 달리 인적이 드물로 일반적인 재래시장 풍경입니다. 사람들에게 입소문난곳은 망원시장 뿐이며, 여기까지 상권이 발달하지 못하였는데 시장 내부를 보면 이해가 됩니다. 망원시장이 쇼핑을 편리를 위해 매장을 개선하고 젊은 사장들이 점포를 운영하는것에 반해 월드컵시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변화가 없다면 뒤쳐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극과극 재래시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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