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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수,열수,경강 그리고 한강 - 스물다섯번째

만리동 너머 젖갈장수 걷던 길 - 2

  마포에서 한양도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여럿방면이 있습니다. 그중에 빠르게 넘어갈 수 있는 곳이 공덕에서 만리재로 넘어가는 길입니다. 지금은 4차선 도로로 남아있지만 고개의 흔적은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도로를 따라 걷기에는 소음이 크고 불편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도로를 벗어나 골목으로 돌아가면 조용하고옛모습이 남아있는 효창동과 공덕동을 거쳐 갑니다. 그사이에 인조잔디가 깔린 축구장 명칭으로 알고 있는 효창원과 김구기념관을 만나면서 단순히 젓갈장수가 걷던 길이 아닌 동네의 문화의 이야기가 있는 길을 걷게 됩니다. 12번째 길은 마을의 골목과 골목을 이어 놓은 길이어서 볼거리, 이야기거리가 여타 코스에 비해 많습니다. 12코스의 두 번째는 효창원부터 시작합니다.



원래의 이름으로 불러주시오, 효창원과 김구기념관,


 공덕역 10번 출구에서 직진하면 브라운스톤 아파트 사이로 공원과 도로가 연결된 길이 보인다. 여기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백범로 39길과 임정로 13길을 따라 가면 효창공원과 만납니다. 원래이름은 효창원이었으나 우리에게 알려진 곳은 효창공원입니다. 효창원은 정조의 장남이었던 문효세자가 묻힌 무덤으로 ‘효창묘‘ 또는 ‘애기능‘으로 불리웠는데 고종때 효창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이장 되었고 1924년 경성부가 효창원의 일부를 공원용지로 책정하면서 효창원이 일반인에게 허용하기 시작되어 현재에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왕족이라 하더라도 누구의 무덤이냐에 따라 능(陵), 원(圆), 묘(墓) 등으로 불리우는데 ’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칭하는 명칭이고 ’원;은 태자와 태자비이 무덤을 치하며, 그 아래 능과 원에 속하지 않은 사람의 무덤은 ‘묘’라고 합니다. 조선의 왕은 대부분 능호를 가지고 있으나 연산군만 능호가 없이 ‘연산군묘’라고 불리웁니다. 이처럼 효창원은 왕세자의 묘로써 넓은 우림과 왕족의 묘지로써 기품이 있었던 곳이였지만 일제강점기때 숲을 파헤쳐 골프장을 만들어 무덤주변을 빙 둘러 고립시킨 듯이 조성한 치욕적인 모습으로 변하였고 유원지로 조성되기도 하였다가 독립이후 김구 선생의 뜻에따라 독립열사의 묘소가 자리하게 되었고 삼의사터옆에는 안중근의사의 묘자리를 가묘의 형태로 두었습니다. 이후 김구선생이 돌아가신 후 이곳에 모셔와 안장을하였고 이승만정부에 아시안컵 개최를 위해 효창원부지 일부를 효창운동장으로 조성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으나 옛 단아했던 정취를 느끼지는 못합니다.



  김구 선생이 경교장에서 암살된 후 국민장을 통해 효창원에 안장되었고 이후 2002년에 김구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을 기념하는 백범김구기념관이 건립되었는데 그 전에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자리를 잡게 됩니다. 현재도 민족역사에 대한 성역화구역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고 무던히 준비하고있으며 명칭 또한 효창공원에서 효창원으로 복귀하자는 의견이 우세하여 어떻게 변화가 될지 궁금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효창원은 생뚱맞게도 반공기념탑과 원효대사의 동상도 세워져 있으며 공원에는 여러 갈래길이 있어 산책하고 휴식하기 좋은 시민들의 휴식처 역할도 겸하고 있습니다.

김구 선생의 묘역



이고개만 넘으면 한양이네, 만리동고개, 약현고개


  효창원 후문을 나서 만리시장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갑니다. 이곳은 용산구와 마포구가 도로를 사이에 두고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효창원로를 공유하는 형태로 행정구역이 나뉘어져 있어 도로 중간에 행정구역을 구분하는 표시판이 특이하게 보이는 곳입니다. 만리시장을 벗어나면 만리재고개에 이르는데 고개 오른편을 내려다 보면 서울역과 빽빽한 고층아파트만 보일 뿐입니다. 예전에는 아현고개보다 높고 가파른 고개여서 꼭 만리나 되는 길을 넘는 듯하다해서 유래된 만리고개 또는 만리재라고 불리웠고 그 명칭이 이어져 만리동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세종임금 시절, 학자중에 올바른 학자이자 집현전의 수장이였던 최만리라는 사람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유능함에 대해 세종은 신문(新門, 돈의문이후 새로이 건설된 성문)밖에 집을 하사했는데 그 집이 들어선 지역이 크고 넓었다고 하며 그에 이름을 따서 만리재라고 불리웠다고 합니다. 또한 만리재는 일제강점기에 공덕동에 있었던 마포형무소가 있었는데 수감자들이나 수감된 사람들을 찾아가는 가족과 지인들도 서울역에서 이 고개를 넘어 찾아갔었습니다.

만리재 공사하는 모습



  만리시장을 경유하다보면 도로변에서 살짝 안쪽에 자리잡은 아주 오래된 이발소를 만날 수 있습니다. 쓰러져가는 건물에 간신히 버티고 서있는 건물안에서 영업을 계속이어오고 있었던 성우이용원으로 약 90여년 이상 가업을 이어받아 3대째 운영하고 있고 서울시에서 관리하는 미래유산으로 등재된 곳입니다. 장발이 유행하던 1960년대에는 성업을 이루었지만 이후 두발자유화와 미용실 확대로 인해 이발소를 찾는 사람이 뜸해져 현재에는 하루에 10명 내외만 찾아오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리모델 공사를 통해 옛 모습은 간데없고 공간의 부조화가 이루어진 상태로 존재하고 있어 옛 모습을 보려면 사진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만리시장에는 또다른 특징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예전 남대문의류시장이 성행할 때 옷을 만들고 납품하던 봉제공장이 모여있던 곳이 만리동이였습니다. 만리동 고개에서 서울역고가도로를 넘어 남대문시장으로 납품을 했었는데 동대문시장일대가 패션/의류시장이 확장되면서 남대문은 수그러들 수 밖에 없었고 이로인해 만리동에 있던 봉제공장들은 폐쇄 또는 동대문시장 근처 창신동으로 이전했고 일부는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시장골목에서 시선을 윘쪽으로 돌리면 봉제, 패턴, 등 봉제공장에서 보던 일본식 단어가 눈에 뜨이기도 합니다.

성우이용관 예전 모습
성우이용관 리모델링 후 모습



  만리시장을 벗어나 언덕 위 도로변에 서있으면 양쪽으로 내려가는 도로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여기가 만리동고개이자 마포구와 용산구의 경계선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개발을 통해 고갯길이 낮아져 언덕정도로 보여지지만 한때는 높은 고갯길이였던 곳이였습니다. 오른쪽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서울역의 반대편인 서부역과 7017로의 시작부분을 마주하며 그 옆으로 염천교가 있고 다리를 건너면 칠패시장터와 서소문이 있었던 공간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옛 상인들은 이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젓갈을 짊어지고 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로 내려가지 않고 손기정기념관과 약현성당을 거쳐 내려가려 합니다.



대륙행 기차을 타고 베를린으로, 손기정기념관


  만리고개에서 100여미터 내려와 왼쪽 고층 아파트사이로 올라서면 손기정기념 체육관과 기념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라톤 하면 제일 먼저 누가 떠오르나요? 대부분에 사람들은 손기정님을 손꼽을 것입니다. 한국인으로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받았고, 2시간 30분대의 기록을 깨고 2시간 29분대 기록을 보유한 분, 그리고 지금은 현실이 아니지만 서울에서 대륙행 열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이동하여 올림픽 경기를 치른 선수이기도 합니다. 일본강점기 때 마라톤 선수로써 세계를 제패한 손기정 선수는 모교인 양정보통학교를 다녔었는데, 양정고등학교로 개편된 이후 1988년 양천구 목동으로 학교가 이전하면서 남은 공간을 손기정 선수를 위한 기념관으로 2012년에 개관하게 되었고, 일부 공간은 체육공원으로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조성하였습니다. 손기정선수가 금메달을 따면서 월계관수, 청동투구와 월계수나무를 받았는데 기념관 옆에 보면 제법 키가 큰 나무가 서있는데 그 당시 받았던 나무가 현재의 크기로 자라났습니다. 일반적으로 올림픽에서 우승하면 받는 것을 월계수나무로 만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베를린 올림픽에서 사용된것은 대왕참나무입니다. 지중해 지방에서만 자라던 월계수나무는 베를린의 기후가 맞지않아 월계수를 사용할 수 없어 미국산 대왕참나무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념관옆에 뿌리내리고 서있는 나무도 대왕참나무입니다. 그리고 우승 당시에는 히틀러로부터 월계관수를 받았는데 이는 육영재단에서 관리해오다가 손기정기념관이 설립되면서 되돌아와 전시가 되고 있으며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 금메달과 우승 상장 등은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 489호로 지정되어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으니 기념관 내부에 들어서서 찬찬히 둘러본다면 1시간 정도 소요될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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