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말이라지만 눈이 오지 않아 더 이상 설경을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소문만 들었던 설매재를 찾아가기로 했다. 고불고불한 도로를 타고 올라가야 하니 눈이 내리면 낭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이 항상 들어 맞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여기는 아직도 설국이였다. 햇볕이 닿지 않는 곳에는 눈과 얼음이 쌓여 발걸음을 느리게 만들었다. 조심히 걸어야 하기도 했지만,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눈 쌓인 길을 보았기 때문이다.
구간 정보 설매재휴양림 - 배너미고개 - ‘관상’촬영지 - 활공장 - 유명산 정상
둘레길 소개
양평군은 전체 면적의 70% 이상이 산지형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제법 높은 산들도 많고 휴양림이나 임도가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계절마다 찾아가는 산음휴양림과 주변 임도마저 양평군에 포함되어 있다. 서울에서 한 시간 여 거리이지만 강원도 어느 골짜기 못지않은 깊은 계곡의 풍경을 볼 수가 있다. 하지만 더 가까운 곳에 또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탁트인 산능선의 이어진 모습과 두물머리가 그 사이로 흘러가는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민둥산 위에 너른 억새밭
양평 아신역을 지나 옥천면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마을길따라 유유히 직진하면 양옆으로 아름다운 주택이 외국의 마을을 지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구불구불 오르막 도로 끝까지 올라가면 ‘배너미고개’라는 이정표를 만난다. 하지만 설매재로 더 이름이 알려져 있고, 주변에도 이러한 이름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고개에 올라 왼쪽을 바라보니 ATV와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고, 차량 통행을 막는 가로막이 세워져 있다. 가로막을 가로질러 그늘진 숲길이 길게 이어져 있다.
여기는 아직도 한 겨울처럼 눈이 가득 쌓여 트레킹을 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눈 밟는 소리가 청아하게 숲길을 가득메우고 있고, 사람들은 잠시동안 아이가 된듯 눈을 뭉쳐 던지거나 사람이 발길이 닿지 않은 쌓인 눈을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20여 분동안 그늘진 숲길을 걸고 나니 햇살을 가득 품은 나대지가 나타난다. 그리고 숲길 왼편으로 탁트인 시야사이로 양평시내와 하얀 눈이 쌓인 용문산 능선이 보인다.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ATV코스이기도 하고 억새군락지이다. 겨울이다 보니 꽃이 모두 져버린 줄기만 덩그라니 남아 있지만 가을에 오면 장관을 이룰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가 유명한 것은 억새군락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는 것과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소 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걷기꾼 입장에서 보면 산길처럼 험하지 않고 평이한 숲길을 걸으며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라는 것이다. 게다가 서울에서 불과 한 시간도 안걸리는 지척에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일 것이다.
여기가 양평이 맞을까?
계속해서 글을 나서니 잣나무가 가로수처럼 서있는 숲길과 시야가 트인 민둥머리 임도를 반복해서 걷는다. 다행인 것은 외길이라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두 어군데 갈림길이 있지만 대부분 다시 모이는 길이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
다시 시야가 트이면서 황금색 벌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산 꼭대기 위에는 바람을 알려주는 풍향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너른 길이지만 차량의 흔적이 넘쳐 길이 페이고 망가져 다니기 불편하다. 도로옆 풀밭을 밟으며 정상까지 올라가니 또 다른 세상이다.
마치 스페인 순례길의 일부처럼 나무가 없고 끝없이 펼쳐진 평야처럼 보였고, 밑으로 내려다 보니 용문산, 어비산, 그리고 바로앞에 유명산 정상이 사방에 펼쳐져 있다. 해발 600미터가 넘는 고원의 지대를 너무나 쉽게 올라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여기가 양평이였다는 것이 새삼 다르게 다가온다. 영남알프스나 정선에서 내려다 볼 법한 풍경이 여기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 세트장이 쉼터가 되다.
활공장을 지나 능선을 계속 따라가면 유명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이후부터는 등산로이기도 하고, 유명산휴양림 또는 중미산휴양림으로 넘어가는 길이라서 설매재까지 자가용으로 되돌아오기가 어려울듯하여 발길을 되돌려 좁은 숲길을 따라 왔던길을 되짚으며 되돌아 간다.
내려오는 길목에서 보니 Y자형 길이 하나 나타난다. 왼쪽으로 올라가니 억새군락지인 ATV코스로 접어든다. 따스한 햇살 때문에 겨울이기보다 이른 봄처럼 느껴진다. 찬찬히 걷가보니 능선 위에 초가 지붕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본듯한 초가집이 머리에 맴돌며 기억을 더듬어 본다.
영화 “관상”의 초입부분, 연홍(김혜수분)이 내경(송강호분)을 찾아가기 위해 억새사이 오솔길을 지나 연통에서 흰연기가 피어나는 초가집으로 걸어간다. 마당에서 붓을 만들던 내경과 팽헌이 연홍을 맞이한다.
이 장면의 촬영지가 여기였다고 한다. 마당에 서서 사립문쪽으로 내려다 보면 한강이 보이고, 억새밭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덩그라니 세트장만 남아 있어 흉측해 보일 수도 있지만, 평상도 그대로 남아 있어 우리같은 걷기꾼에게 쉼터가 된다. 주변을 둘러보며 잠시나마 영화속 장면들을 상상해 본다. 이외에도 여기는 몇 편의 영화의 장소로 나왔었다. 모두 기억할 수는 없으나 이곳을 다녀온 후 영화 속 여기가 나오면 금새 알아 볼 수 있었다.
다시 도심 속으로...
눈 속에서 매화가 피어난다는 설매재... 생각지도 않게 그냥 숲길일거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찾아왔지만 너무나 큰 인상을 남기게 만든다. 시원스런 풍경과 잣나무숲길, 그리고 억새가 가득한 산머리의 모습, 그리고 푸르른 하늘색이 어우러진 부드러운 색감이 여기서 느낀 전부이다.
마냥 꿈속에서 길을 걷고 나온 듯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도심 속 회색 세상으로 되돌아 왔다.
추천 TIP.
1) 배너미재입구는 항상 가로막이 설치되어 있다. 그래서 차량진입은 할 수 없다.
2) 패러글라이딩 활공장과 이어져 있는데다, ATV 코스와 겹치기 때문에 하절기에는 복잡할 수 있다. 등산객은 진입할 경우 별도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하지만 겨울철에는 관리자가 없어 그냥 진입이 가능하다.
3) 숲길을 따라 20여분 걸어가면 시야가 트이는 억새군락지가 나온다. 오른쪽 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관상" 영화의 촬영지였던 장소가 나오며, 소품용 세트가 남아 있다.
4) 너른 숲길을 계속 따라가면 패러글라이딩 활공장과 만나며, 이곳이 내려다 보는 풍경이 일품이다. 더 숲길을 따라 가면 유명산 정상과 만난다
5) 겨울철에는 설매재고개(배너미고개)까지 올라가는 길에 눈이 남아있어 차량 소통이 어려울 수도 있다. 설매재 휴양림이나 아래 길 주변에 차를 세우고 약 2~3km 오르막 포장길을 올라가야 한다.
6) 배너미고개 옆에 ATV 관리소가 있는데 사유지 이기 때문에 하절기에는 별도의 입장료를 받는다고 한다. 겨울철에는 찾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그냥 진입해도 무방하다.
7) 쉼터와 같은 벤치, 화장실이 전혀 없기 때문에 사전에 돗자리나 간이의자 등을 준비하면 도움이 된다.
둘레길 찾아가기
1) 대중교통
양평터미널에서 6-3번 버스를 타고 ‘용천3리,마을회관’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약 7km 정도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버스는 하루 3회 운행하기 때문에 시간을 확인하여야 한다.
2) 자가용
네비게이션에서 ‘설매재휴양림’ 또는 ‘배너미고개’를 검색하고 찾아오면 된다. 고개마루에 주차할 만한 공간이 넓지 않기 때문에 설매재휴양림(유료)에서 주차한 뒤 약 2km 정도 오르막 포장길을 따라 올라가는게 낫다.
맛보고 갑시다!!
1) 시골밥상 (031-774-3819)
옥천면 마을 초입에 있는 곳으로 산채위주의 반찬이 나온다. 짜지 않고 담백하고, 시골의 집밥 맛처럼 느껴진다. 시골밥상은 7,000원 이며, 이외에 생태탕, 닭백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