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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용 Jan 14. 2021

미국, 시체 사진을 문자로 받았다

미국 생활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한 보이스피싱... 할리우드 영화수준

미국 도착한 당일 핸드폰을 개통했다. 몇 분 후 벨이 울렸다. 미국에서 나를 찾는 첫 번째 전화였다. 반갑게 받았다. 전화금융사기(보이싱피싱)이었다. '보이스피싱이 미국에도 있구나' 생각하며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절대 그렇지 않았다. 미국에서 2년간 받았던 보이싱피싱이 평생 한국에서 살면서 받았던 것보다 많았다. 게다가 미국 보이스피싱은 내용 구성면에서 가히 할리우드 영화 수준이었다.


* 출처: Pixabay


할리우드 수준급 미국 보이스피싱


한 번은 문자로 사람 사체 사진을 받았다. 곧바로 미국 연방수사국(FBI)이라며 전화가 걸려왔다. 이 사진이 내가 연루된 살인사건이라고 했다. 순간 심장이 멈출 듯 긴장했다. 섭씨 45도까지 치솟는 애리조나 후끈한 날씨가 일순 서늘하게 느껴졌다. 


평상시 보이스피싱 낌새가 있으면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이번엔 이야기 전개가 궁금했다. 곧 경찰이 집에 들이닥쳐 나를 체포할 것이라고 알려줬다. 현실에서 보기 힘든 상냥한 FBI 요원이었다. 누명을 벗기 위해 사회보장번호(SSN: Social Security Number) 등 개인정보가 필요하다고 했다.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 다급한 목소리와 '살인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어휘에 판단이 흐려질 뻔했다.


그 다음 날로 기억한다. 또 다른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았다. 중국 영사관을 사칭한 전화다. 중국인이라고 생각되는 동양인을 겨냥하는 사기 전화였다. 중국어를 배운 적이 있어, 전화 내용을 들어봤다. 내가 수취할 소포가 금융 범죄와 연관되어 있어 곧 나는 불법체류자가 된다고 경고했다. 역시 해결 방법은 돈을 이체하라는 것이다. 발신자 번호를 찾아보니 정말로 중국 영사관 번호였다. 발신 번호까지 조작하는 스푸핑(Spoofing) 기술이다.


이 순간에도 미국에선 전화가 쉴 새 없이 울리고 있을 것이다. 값진 시간만 뺏기면 운이 좋은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전화 한 통으로 금전적인 피해를 본다. 보이스피싱으로 통탄(痛歎)에 빠져 있는 미국인은 얼마나 될까?


미국의 여론조사회사 해리스 폴(Harris Poll)에 따르면, 2019년 3월부터 1년간 5600만 미국인들이 보이스피싱 손해를 입었다. 대한민국 전체 인구만큼 사기 전화에 당한 셈이다. 2018년 같은 기간 보이스피싱으로 피해를 본 미국인은 4300만명이었다. 1년 새 1300만명이 증가한 것이다. 지난 6년간 피해자 수는 매년 평균 30% 이상 늘어났다. 2019년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약 190억달러(약20조원)로 추정했다. 이는 전년 같은 기간보다 무려 88% 증가한 금액이다. 그 증가세가 폭발적이다.


요즘 코로나19 유행이 장기화하면서 '보이스피싱' 호황이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재택근무로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보이스피싱은 근무 시간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미국인들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거다. 코로나 블루(우울증)에 보이스피싱의 짜증까지 더해지고 있는 셈이다. 


날이 갈수록 성행하는 보이스피싱


미국에서 보이스피싱이 횡행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아마도 전 세계적으로도 대동소이할 것이다. 


첫째, 보이스피싱 생산비용 감소이다. 미국 보이스피싱 피해자 5명 중 3명은 로보콜(자동녹음 전화)을 받는다. 자동 다이얼링 시스템(Automatic Dialing System)은 짧은 시간에 불특정 다수에게 전화를 건다.


컴퓨터 음성을 사용하여 인건비도 대폭 줄였다. 컴퓨터 장비 하나만 있으면 단시간 내 무작위로 수억 통의 전화를 걸 수 있다. 전화 한 통에 1센트도 소요되지 않지만, 피해자 한 명만 낚아채면 그 이익은 적게는 몇백 달러에서 많게는 수백만 달러이다. 비용 대비 수익이 높다. 


둘째, 발신자 추적이 쉽지 않다. 미국인들은 보이스피싱을 피하고자 연방거래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의 'Do Not Call Registry'에 가입한다. 이 리스트에 가입된 사람에게 보이스피싱 전화를 하게 되면 큰 금액의 벌금을 물게 된다.


로보콜은 이 벌과금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발신자 번호를 교란하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을 이용해 발신자 번호를 변경한다. 발신자를 정부 기관, 다른 회사 번호로 둔갑시킨다. 심지어 수신자가 다니는 회사 발신 번호로 전화를 건다. 이럴 땐, 걸려온 전화를 무시하기 쉽지 않다.


셋째, 인터넷의 발달이다. 옛날엔 AT&T 등 1, 2개의 대표적인 통신회사가 미국 시장을 과점했다. 폐쇄된 시장이었다. 오늘날 통신 시스템은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수만 개의 크고 작은 회사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통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연방통신위원회(Federal Communications Commission, FCC)는 미국 통신기업에 로보콜을 필터링하는 자체 시스템 구축을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 조성은 인터넷 초연결 시대에 기술적으로 용이하지 않다.


미국 생활 초기에는 보이싱피싱 대처법을 찾아봤다. '무시하라', '녹음하라', '신고하라' 등등 원론적인 얘기뿐이었다. 뾰족한 대처 방안은 없었다. 결국, 본인의 분별력이 가장 중요했다.


미국 2년간의 짧은 생활을 끝내고 비행기 탑승 직전 전화벨이 울렸다. 미국에서 나를 찾는 마지막 전화였다. 역시나 보이스피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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