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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시코기 May 26. 2020

서로의 입장이 달라도, 우리의 목적지는 같기에

<미스비헤이비어> 2020, 필립파 로소프 감독





여자라는 이유로 학계에서 무시당하지만 실력으로 이기겠다는 여성 운동가이자 역사가 '샐리'(키이라 나이틀리), 성적 대상화의 주범 미스월드에 한 방 먹일 작전을 짠 페미니스트 예술가 '조'(제시 버클리), 역사상 최초의 미스 그레나다로서 흑인 아이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은 '제니퍼'(구구 바샤-로). 1970년, 달 착륙과 월드컵 결승보다 더 많은 1억 명이 지켜본 '미스월드' 성적 대상화를 국민 스포츠로 만든 미스월드에 맞서 진정한 자유를 외친 여성들의 반란이 시작된다.




“우리는 예쁘지도 추하지도 않다.
우리는 화가 났을 뿐이다.”
- 샐리 알렉산더


생각보다 유쾌한 분위기에 놀랐고, 또 생각보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 놀랐다. 실제로 영화를 연출한 필립파 로소프 감독은 <미스비헤이비어>가 "유쾌하게 춤추고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페스티벌 같은 영화"로 기억되길 진심으로 원했다고 밝혔다. 감독은 샐리 알렉산더와 조 로빈슨을 인터뷰하면서 미스월드 반대 시위는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당시 그들이 엄숙하기보단 매우 설레고 즐거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를 계기로 영화를 무겁고 어두운 전기 영화로 연출하기보다 성별과 연령을 불문하고 재밌게 관람할 수 있으면서도, 영화가 끝난 후에는 생각할 거리가 있는 페미니즘 드라마로 완성하기로 결심했다. 그만큼 영화 <미스비헤이비어>는 유쾌하되 가볍지만은 않은 묵직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관객이 영화 자체를 즐기면서도 그 속에서 생각할 거리를 가져갈 수 있도록 유도한다.


1970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미스월드'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세 인물을 주축으로 전개된다. 각각 자신을 학자보다 여성으로 대하는 남성들 사이에서 실력으로 인정받기 위해 분투하는 여성 운동가이자 역사가 ‘샐리’, 여성해방과 자유를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페미니스트 예술가 ‘조’ 그리고 역사상 최초의 미스 그레나다가 되어 흑인 아이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은 ‘제니퍼’. 영화는 한편에서는 샐리와 조가 주 구성원으로 활동하는 여성 단체 '그로브너 크루'의 모습을, 다른 한편에서는 미스월드 참가자 제니퍼를 중심으로 미스월드의 현장을 그려내며 두 공간을 교차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전개해간다. 다른 세대에 비해 비교적으로 매체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2세대 페미니즘 물결을 다룬 영화인 만큼 관객은 그로브너 크루를 통해 당시 여성 해방 운동(Women Liberation Movement)의 양상을 볼 수 있다. 가부장제 타도를 외치며 동일 임금 동일 노동, 신체의 자유, 낙태나 피임의 자유를 주장하는 모습이 영화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영화를 보며 가장 좋았던 점은 영화가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의 입장을 보여주려 한 것이었다. 영화는 같은 여성일지라도 빈부, 계급에서 인종까지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다른 입장과 차이를 간과하지 않고 직시하며 모든 여성이 균등한 기회를 가진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샐리와 조가 비판, 반대하던 성상품화와 오락의 도구 미스월드는 제니퍼에게 참가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기회이자 도전이다. 특히나 샐리와 제니퍼가 화장실에서 마주치는 장면은 이 영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경찰에게 호송되던 샐리는 잠시 화장실에 들리는데, 그곳에서 우승자 제니퍼와 마주하게 된다. 자신이 우승한 대회를 망쳐버린 샐리를, 자신이 그토록 반대하던 대회의 우승자 제니퍼를 서로가 비난할 법 하지만 이 둘은 오히려 덤덤하게 대화를 나눈다. 미스월드의 참가자가 아닌 '미스월드' 자체를 비판하던 샐리는 제니퍼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제니퍼는 샐리를 끌고 가는 경찰들에게 부디 친절하게 대해달라고 진심으로 소리친다.


이 장면과 관련한 일화가 있다. 미스월드 반대 시위 이후 40년 만인 2010년, <미스비헤이비어>의 작가 레베카 프라이언과 프로듀서 수잔 맥키는 미스월드를 반대한 ‘샐리 알렉산더’와 ‘조 로빈슨’, 그리고 미스월드에 우승한 ‘제니퍼 호스텐’이 출연한 BBC Radio 4 ‘더 리유니온’을 실시간으로 청취했다. ‘1970년 미스월드 반대파와 미스월드 우승자의 만남’이라는 헤드라인은 두 그룹의 싸움을 유도하는 듯싶었지만 생방송은 정반대의 상황으로 흘러간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관점으로 인해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여성의 자유와 선택을 위해 최전선에서 함께 싸운 동료였다며 서로에게 존경을 표했다. 또한 그들은 인터뷰 중 “이곳은 우리 모두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자리, 그리고 다음 세대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영감을 주기 위한 시간”이라며 자신들의 소감을 전했다. 그 순간, 레베카 프라이언과 수잔 맥키는 이 이야기가 훌륭한 영화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고 한다.


 "우리 모두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자리, 그리고 다음 세대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영감을 주기 위한 시간", 이것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그들의 승리를 기념하면서도 당시의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관점을 보여주며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 속에는 샐리와 조, 제니퍼의 입장에 더해 미래를 보지 못하고 눈앞의 실리만 챙기던 아둔한 미스월드 창시자 에릭 몰리와 진행자 밥 호프의 입장과 그들 곁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아내들의 입장이 있으며, 현실에 순응하고 자식들을 키우며 살아오다 딸을 보며 무언가를 느끼게 되는 샐리의 엄마 에블린 알렉산더의 입장과 미디어의 영향을 인지하지 못하고 따라하게 되는 샐리의 딸의 입장도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세 인물 샐리와 조, 제니퍼는 각자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 순간 그들의 얼굴은 실존 인물의 얼굴로 바뀐다. 그 순간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라는 사실이 부각되며, 영화의 주제를 다시금 상기하게 만든다.


여성은 물건이 아닙니다.
장식품도 아니고요.
누굴 기쁘게 하려고 있지도 않죠.
- 샐리 알렉산더

 영화의 제목 '미스비헤이비어(Misbehaviour)'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기존의 질서(미스월드)를 거부하는 행동이라는 의미이고, 둘째는 여성들(MIS-)의 행동(BEHAVIOUR)이라는 의미이다. 들은 당시의 여성 차별적 사회 질서에 거부하던 자신들의 행동이 옳도록 만들었으며, 그 행동을 여전히 실천 중이다. <미스비헤이비어>는 당시 여성들의 행동을 기념하면서, 동시에 현재까지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차별을 은연중에 꼬집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 스스로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세대를 위해 여성의 자유를 외치던 이들의 열정과 행보는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이자 영감이  것이다. 어쩌면 영화는 당시보다도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의 세대와 다음 세대, 또 그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의 행보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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