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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시코기 Jun 29. 2020

죽은 자와 아무것도 아닌 자의 여정

<데드 맨> 1995, 짐 자무쉬 감독






‘윌리엄 블레이크(조니뎁)’는 취직 통지서를 받고 머신 타운으로 향한다. 취직은커녕 가지고 있던 돈까지 모두 잃은 그는 우연히 꽃을 파는 여자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갑자기 그녀의 전 연인이 집에 들이닥치고 당황한 윌리엄은 그를 죽인다. 가슴에 총상을 입은 채 황급히 도망치던 그는 숲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인디언 ‘노바디(게리 파머)’가 그를 발견해 간호해주고, 두 사람은 함께 여정을 떠난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와는 여행하지 않는 편이 좋다.
-앙리 미쇼


죽은 자와 아무것도 아닌 자

<데드 맨>을 보다 보면 장면 장면이 뚝뚝 끊긴 것 같은 인상을 갖게 된다. 잦은 암전 효과와 시간 점프가 그 이유다. 선형적인 플롯을 가지고 그것에 따라가는 영화지만, 각 장면 사이의 연결은 그에 비해 헐겁다. 열차 장면과 같이 같은 공간에서 반복되는 행태를 통해 리듬을 만들어내는 장면이 여럿 존재하긴 하지만, 이야기가 뚝뚝 끊기는 것만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연출은 마치 각 장면이 앞뒤 장면과의 인과성 없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만 같은 효과를 줬다. 거기에 명암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흑백의 이미지는 강렬한 인상을 더했다. 영화의 음악 또한 독특하게 만들어졌다. 짐 자무쉬 감독은 영화를 다 만든 상태에서 닐 영 음악 감독에게 기타를 즉흥 연주해 녹음하도록 지시했다. 영화에 사용된 곡들은 모두 영화를 처음 마주한 닐 영의 즉흥연주로 구성된 것이다. 이런 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되는 2시간 여의 긴 곡을 듣는 느낌을 주며 영화의 몽환적인 느낌을 더했다. 감독 또한 이 영화를 "사이키델릭 웨스턴(Psychedelic Western) 영화"라고 칭한 것처럼 이 영화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자의 긴 꿈을 들여다보는 듯한 몽환적이고 환각적인 인상을 준다.
 
‘데드 맨’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영화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죽은 자 윌리엄의 여정을 따라, 차츰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간다. 우연히 마주쳐 하룻밤을 보내게 된 여자의 방에서 갑작스러운 총격전이 벌어진 후, 윌리엄은 여자의 전 연인을 쏴 죽이고 자신 또한 총상을 입는다. 잡히지 않기 위해 도피하던 중 그는 숲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그런 그를 노바디가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윌리엄은 첫 총격을 맞던 순간에, 혹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죽었을 수도 있다. 우리가 본 것은 그의 영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는 노바디의 믿음처럼 애초에 윌리엄 블레이크가 환생한 것일 수도 있다. 과정이 어찌 됐건 그는 죽은 사람이며, 곧 죽을 사람이다. 환영을 보여주는 약초를 먹은 노바디의 눈에 그가 해골로 보는 장면은 이 점을 암시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데드 맨>은 주인공 윌리엄 블레이크의 여정임과 동시에 두 존재 ‘죽은 자(Dead Man)’와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의 여정이 된다. 두 사람에게는 모두 윌리엄 블레이크와 엑세이바체이라는 각자의 이름이 있지만, 윌리엄의 이름은 영국의 유명 시인과 같으며, 엑세이바체이는 자신이 노바디라 불리길 원한다. 영화는 두 사람의 여정을 따라가며 두 사람을 카메라에 비춘다.




매일 밤
그리고 매일 아침
누군가 고통으로 태어난다네
매일 아침
그리고 매일 밤
누군가 달콤한 기쁨으로 태어난다네



멍청한 백인들

<데드 맨>은 웨스턴 장르의 인상을 풍기지만, 오히려 웨스턴 장르의 형식을 비틀며 미국의 서부 개척 신화를 비판하는 영화다. 영화는 실제 19세기 미국 서부의 모습이나 기존 웨스턴 장르의 틀을 따르기보다는 그 세계관을 전복시키며 반대의 상황을 상상하는, 짐 자무쉬 감독의 상상적인 세계관에 따랐다. 특히나 주인공 윌리엄은 그러한 세계에서도 혼자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는 19세기 미국 서부라는 배경과 맞지 않게 허연 얼굴에 체크무늬 슈트를 입으며 동그랗고 작은 안경을 쓴다. 또한 매사에 힘이 없어 보이며 남의 눈치를 많이 보고, 총 하나 제대로 못 쏜다. 노바디 또한 그렇다. 일반적인 인디언들과 다르게 그는 무리 지어 다니지 않고 혼자 다닌다. 함께하면 안 되는 부족의 부모 사이에서 혼혈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무리에서 버려졌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윌리엄과의 첫 만남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읊는다. 이 영화 속의 인디언은 서부극에서 일반적으로 묘사되는 인디언의 모습과는 달리 야만적이지 않다. 오히려 문명적이고 지적이다. 이에 비해 백인들의 마을은 황폐하고 우울하며 온 바닥이 진흙 투성이다. 더구나 백인들은 시답잖은 농담만 주고받는 멍청한 존재로 묘사된다. 보안관은 주인공의 총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등장하는 수많은 총잡이들은 정의와는 거리가 먼 비열하고 얍삽한 인간들이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먹을 것이 없을 때 거리낌 없이 식인을 하기도 한다.
 
백인 세계에 속해 있던 윌리엄은 점점 인디언 세계에 가까워진다. 그의 총상을 보며 차라리 칼로 심장을 도려내 영혼을 풀어주는 게 낫겠다던 노바디는 그가 자신이 왔던 곳이자 모든 영혼들이 왔던 곳으로 다시 떠날 수 있도록 그를 물로 만든 다리까지 데리고 간다. 종국에 그는 총과 금속이 가득한 머신 타운을 지나 벗어나 인디언 마을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나무 조형물이 가득하다. 사실 윌리엄의 종착지는 영화의 초반부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열차에서 그에게 머신 타운에 가는 것은 무덤을 파는 거나 마찬가지라 충고하는 장면은 사실상 그에 대한 예언 장면이다. 그렇게 영화는 이미 죽은 자가 죽음이라는 결정되어 있는 결말을 향해 가는 죽음의 여정을 담아낸다. 자신을 잡기 위해 쫓아오는 이들을 피해 도피하던 윌리엄은 점점 평안해지며 지금 세상과의 마지막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영화에 이와 관련해 특히나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윌리엄은 숲에서 총 맞아 죽은 사슴의 사체를 목격한다. 가까이 다가가 사슴의 굳어가는 피를 만지고는 자기 상처의 피를 같은 손가락으로 다시 만져본다. 사슴과 그의 피가 합쳐진다. 그 피를 얼굴에 칠한다. 그리고는 사슴을 안으며 그 곁에 눕는다. 이때 카메라가 회전하면서 하늘을 비추고 그의 모습과 하늘이 겹쳐 보인다. 죽음 앞에 동등한 두 대상이 하나가 되며 합쳐지는 이 장면은 영화에 시적인 느낌을 더하며 고독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뿜는다. 점점 죽음에 다가가는 윌리엄의 모습에서 이 장면이 계속해서 겹쳐 보였다. 어쩌면 바로 이때 그는 자신의 죽음을 비로소 받아들이고 데드 맨이 된 게 아니었을까.




*이 글은 아래 링크의 글과 동일합니다.


https://m.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7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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