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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시코기 Jul 06. 2020

도시를 배회하는 유령들

<트랜짓> 2018,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





독일군이 파리로 진군하는 중에 독일 난민 '게오르그(프란츠 로고스키)'는 마르세유로 탈출한다. 그는 자살한 '바이델' 작가의 가방을 갖게 되는데 가방에는 작가의 원고와 작가 아내에게서 온 편지, 멕시코 대사관에서 온 비자 허가서가 들어 있다. 게오르그는 바이델 작가로 신분 위조해 멕시코로 떠나려 하지만 '마리(파울라 베어)'를 만나며 심경에 변화가 생긴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트랜짓>은 동독 작가 안나 제거스가 마르세유로 탈출해 멕시코로 가는 망명 생활 중 쓴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국내에는 『통과비자』로 알려진 작품이다. 영화는 소설과 마찬가지로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하며 나치 점령 사실에 대한 추측을 불러일으키지만, 영화의 배경이 1940년대를 기반으로 설정된 점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오히려 건축양식이나 인물들의 의상을 통해 과거와 현대를 뒤섞음으로써 두 시대가 명확하게 공존하는 가상의 마르세유를 만들어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상황을 기반 삼은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21세기 현재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트랜짓>은 단순히 원작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는 방식에 갇히지 않고, 과거의 이야기를 오늘날로 불러와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2차 세계대전 배경에서 펼쳐지는 당시 난민들의 이야기가 21세기 현재의 유럽 난민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감독의 철저한 의도에 따른 것이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우리는 마르세유를 떠도는 오래된 유령이 아니라 지금의 유령을 표현하고 싶었다"며 직접적으로 영화의 의도를 표명하기도 했다. 이렇게 감독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묘한 불협화음을 유지해나가며 그것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영화를 전개해나간다.




모든 것이 도주 중에 있었고, 모든 것이 지나가버리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상태가 내일까지 지속될지, 아니면 몇 주 더, 아니면 몇 년, 아니면 우리의 평생 동안 지속될지 아직 몰랐다.

55p, 『통과비자』

영화의 제목 '트랜짓(Transit)'에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원작의 한국 제목이기도 한 통과비자, 통행증이라는 뜻이며, 다른 하나는 조금 더 포괄적으로 통과, 통행이라는 뜻이다. 원작에서 게오르그가 언급하는 것처럼 영화 속 세계는 모든 것이 도주 중이며 지나가버리는 것에 불과한 '통과'의 세계다. 마르세유는 도착지가 될 수 없다. 마르세유에 있기 위해서는 마르세유에 머물지 않고 단지 그곳을 경유한다는 것을 증명해 통과비자를 발급받아야 하고, 그것을 증명하려면 최종 체류하려는 국가의 비자가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수많은 서류 중 하나라도 유효기간이 지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모든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난민들이 품은 자유에 대한 희망은 서류 하나에 의해 쉽게 기만당하고, 그들은 좌절하며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야 만다. 그렇게 그들은 죽음을 피해 다시 죽음 속으로 달아나는 무의미한 쳇바퀴질을 반복한다. 그들은 그곳을 떠나지도 남지도 못하는, 명백히 그곳에 실재하면서 그 존재를 지워짐 당하는 유령이 된다.


당시에 모두가 바라는 오직 한 가지 소망은 떠나는 것이었다. 또 모두가 두려워하는 단 한 가지 공포는 뒤에 남게 되는 것이었다.

197p, 『통과비자』

이는 게오르그 또한 마찬가지다. 게오르그는 마리를 만나면서 일종의 희망을 품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그곳을 탈출하는 미래를 상상하며 그녀의 탈출을 돕는다. 그러나 마리는 게오르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마리는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며 바이델만을 기다린다. 마리와 함께 떠나려던 게오르그의 사랑은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그녀를 몬트리올 호에 태워 보낸다. 다만 자신은 배에 타지 않는다. 그러나 몬트리올 호는 침몰하고, 게오르그는 그 배에 탄 마리를 포함한 모두가 죽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그곳을 떠나려는 희망을 품었던 자들은 주검이 되어 그곳에 남는다. 누구도 제대로 통과하는 자는 없다. 마르세유는 통과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통과의 기회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난민들에게는 그 기회가 애초에 있을 수 없는 곳. 갑자기 누군가가 사라지거나 죽어도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일종의 당연한 순리처럼 받아들여진다. 영화 초반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던 게오르그 조차 자신이 애틋하게 여기던 아이와 그의 엄마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게오르그 또한 그 세계에 익숙해진 것이다. 떠나려는 자들은 떠나지 못하고, 남겨진 자들은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일이 마르세유에서는 당연시되며 일상이 된다.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 중
누가 더 먼저 상대를 잊을까요?


영화와 원작 소설의 차이점 중 하나는 원작 소설은 게오르그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과 다르게, 영화는 바텐더의 내레이션을 통해 그의 이야기가 전달된다는 것이다. 원작 소설과 영화 모두 같은 장면으로 끝나지만, 그것을 관객(독자)에게 전달하는 사람이 다르다. 영화는 타자의 시선에서 게오르그의 모든 것을 관조하는 서술 형식의 통해 이야기의 미완의 인상을 강조했다.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 중 누가 더 먼저 상대를 잊을까", 마리의 질문에 대한 이 영화의 답은 떠난 사람일 것이다. 남겨진 마리가 바이델을 잊지 못했듯, 마리를 떠나보낸 게오르그는 마리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게오르그는 돌아오지 못할 사람을 기다리며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슬픈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기다리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밝게 웃는다. 그는 만나지 못할 마리를 유령으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유령과 재회하는 상황을 상상한다. 더 이상 만날 수도, 찾을 수도 없는 죽은 자를 기다리다 지치는 것보다, 이전처럼 도시를 배회하는 유령 하나를 만들어내는 길을 택한다. <트랜짓>은 그렇게 목적지 없이 도시를 배회하는 수많은 유령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의 이야기는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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