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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시코기 Jul 20. 2020

현대인의 무기력증에 대한 우화

<비바리움> 2019, 로칸 피네건 감독






'톰(제시 아이젠버그)'과 '젬마(이모전 푸츠)' 부부는 새로 살 집을 알아보던 중 중개인에게 '욘더'라는 독특한 마을의 집을 소개받는다. 집을 둘러보며 원인 모를 이상함을 느끼던 중에 갑자기 중개인이 사라져 버리고, 부부는 그대로 그곳에 갇히게 된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좌) <여우들>(Foxes, 2011) / (우) <비바리움>(Vivarium, 2019)

<비바리움>의 '욘더' 마을은 로칸 피네건 감독의 영화에서 낯선 설정이 아니다. 감독은 이전에 만든 단편 영화 <여우들>(Foxes, 2011)에서 먼저 유사한 세계관을 내비쳤으며, 당시의 상상을 구체화한 영화가 <비바리움>이라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여우들>을 만들 당시 로칸 피네건 감독과 공동 각본가 가렛 샌리는 2000년대 초반 아일랜드의 경제 호황 이후, 2008년 경제가 급격히 침체되면서 버려진 주택 개발의 흔적에 주목했다. <여우들>의 주인공은 버려진 주택 단지에 사는 부부로, 사진작가인 아내는 일거리를 찾던 중 마을의 여우를 찍으면서 점점 여우에 집착하게 되고, 결국 여우가 된다. 집에 고립된 인물이 야생동물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이 영화의 초자연적인 설정과 다르게, <비바리움>의 설정은 다소 공상과학적이며, 영화 전반에 걸쳐 우울한 정서가 짙게 깔려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현대의 젊은 세대에 대한 감독과 각본가의 고찰이 있다. 영화를 만들던 초기 과정에 사회의 구성 조건들에 대해 생각하던 두 사람은 '지금의 젊은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됐고, 젊은 세대는 삶이 반복적이고 지루해지면서 희망과 꿈이 사라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사실 욘더에서 두 사람이 겪게 되는 사건들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정체 모를 누군가가 이들을 마을에 가두고, 필요한 것을 박스를 통해 전달받으며, 모든 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이들이 겪는 사건들은 젊은 두 사람이 결혼해 함께 산다면 겪게 될 만한, 익숙한 풍경이다. <비바리움>은 주체적인 행동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에 처한 인물의 공포감을 건드리며, 그 이면에서는 현대 사회에 만연화된 소비 자본주의 행태를 비판하는 영화라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계약에 의해 고립되고 덫에 걸리는 젊은 부부 톰과 젬마를 지금의 젊은 세대로 직접 치환하며 영화를 본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비바리움(Vivarium)
: 관찰이나 연구를 목적으로 동물이나 식물을 가두어놓고 사육하는 공간.



영화는 뻐꾸기의 탁란 장면으로 시작된다. 뻐꾸기가 다른 새의 둥지에 자신의 알을 낳고, 부화한 뻐꾸기 새끼는 둥지의 다른 새끼들을 모조리 밖으로 밀어낸다. 어미새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뻐꾸기 새끼가 자기 새끼인 줄 알며 먹이를 주며 정성껏 기른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나무에서 떨어져 죽은 새끼 새들을 보고 끔찍하다며 자신들의 둥지를 만들면 되지 않느냐는 유치원 아이의 말에 젬마는 그건 "자연의 섭리"라 답하고, 이후에 등장하는 톰은 새들을 묻어주며 "불쌍한 것들, 잔인한 세상이야"라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이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모른 채 나누는 대화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으로 느껴진다. 미래의 이들은 갑자기 갇히게 된 집에서 인간인지조차 불분명한 존재를 대리해 기르게 되고, 결국에는 죽음을 맞게 되니 말이다. 영화는 직접적인 제목처럼 욘더라는 잔인한 세상에서 그들의 섭리에 따라 당연하게 희생되는 이들을 멀리서 실험, 관조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비바리움'에 이들을 가둔 이의 정체는 불분명하다. 똑같이 생긴 집들이 줄지어 있고, 한 방향으로 걸어도 다시 같은 장소에 도착하며, 아무런 냄새, 바람, 햇빛도 존재하지 않는 인조적인 곳. 우리는 이러한 단편적인 정보를 통해 욘더 마을의 정체에 대해 추측하는 수밖에 없다. '마틴'의 정체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는 이들에 대한 단서를 흩뿌려놓을 뿐, 그 정체에 대해 파악 가능할 정도로 구체화시키지 않으며 상상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누가 부부를 그렇도록 만드는가 하는 것보다도 부부가 결국 모든 일을 당한다는 점이다. 특히나 이들은 강제로 아이를 기르게 되는데, 아이는 밥을 안 줄 때,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먹이를 갈구하는 새와 같이 괴성을 지른다. 시작부의 뻐꾸기 새끼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욘더에 갇힌 지 98일째에 아이는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가 돼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인이 된다. 마지막 장면의'마틴'이 늙은 상태인 것을 고려해볼 때, 욘더는 일반 세계와 동떨어진 순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땅을 파면 가장 끝에 무언가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계속해서 땅을 파던 톰은 점점 쇠약해지다 죽게 된다. 남편의 죽음에 절망하던 젬마는 (성인이 된) 아이를 기습 공격하고, 아이는 보도블록 아래의 차원으로 도망친다. 아이를 따라간 젬마는 그 안에서 평행우주의 세계를 보게 된다. 자신들과 같이 그곳에 갇혀 고통스러워하는 수많은 이들을 목격하고 절망하는 그에게, 도망쳤던 아이가 다시 찾아와 말한다. "당신은 엄마야." 욘더에 갇힌 사람들은 정체 모를 아이를 길러 세상에 내보내고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 이상이 아닌 것이다. 새로운 '마틴'을 키워낸 젬마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고 진공 포장돼 톰과 함께 묻힌다. 늙은 마틴은 새로운 마틴으로 교체되고, 이름 잃은 죽은 남자는 포장되어 서랍에 넣어진다. 새로운 마틴이 같은 자리에서 새 손님을 맞이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비바리움>은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개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의 무기력증을 직접적으로 비유한 우화로 보인다. 욘더의 획일화된 주택 단지 풍경은 현대의 공동 주택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사실 익숙한 풍경이다. 욘더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정해진 위치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늘의 구름까지 모든 것이 가짜인 욘더의 모습은 자연을 지워내며 기계적으로 변해 가는 현대의 풍경을 풍자한다. 욘더 안에서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하는 인물들은 개성을 잃어가는 현 세태의 모습과 겹쳐보인다. 욘더를 보며 우리가 느끼는 기시감은 아마도 로칸 피네건 감독이 현 세태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선에서 기인한 것일 테다. 그런 의미에서 <비바리움>은 모든 것이 일률화 되어가는 현재를 경계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가 톰과 젬마처럼 될 수 있다는 감독의 섬뜩한 경고처럼 느껴진다.




*이 글은 아래 링크의 글과 동일합니다.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7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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