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시코기 Jan 08. 2020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아름다운 포물선

<나이브스 아웃 > 2019, 라이언 존슨 감독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미스터리 작가가 85세 생일에 숨진 채 발견된다. 그의 죽음의 원인을 파헤치기 위해 경찰과 함께 탐정 브누아 블랑이 파견 되는데...



영화 <나이브스 아웃>을 단순히 후더닛(Whodunnit) 무비의 범주에만 놓고 본다면 어딘가 아쉬운 영화처럼 느껴질 것임은 분명하다. 용의자 한 명 한 명의 진술을 나열하며 사건의 미스터리를 잘 가지고 가다가 영화의 중반이 채 되기도 전에 범인을 밝히는 후더닛 무비라니, 아마도 탐정의 범인 찾기 과정에서 오는 스릴감을 기대했던 일부 관객은 그 순간에 김이 팍 샜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 영화의 진가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발휘된다고 할 수 있다.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과 ‘다수의 용의자 속에서 범인을 찾는 탐정의 추리 쇼’라는 설정은 사실상 추리 영화의 전형적인 구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초반부를 보고 있자면 최근의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 <비뚤어진 집>이 떠오르기도 한다. 고딕 풍의 과장된 분위기부터 소품, 의상의 디테일까지 영화에는 고전 추리물 팬들의 흥미를 자극할만한 요소들이 가득하다. 잘 만든 정통 추리 영화를 보기 힘든 요즘의 정통 추리물 팬들을 설레게 만들기엔 이런 점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단순한 일차적 구현에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가 보다 새로운 이야기를 구축해낸다. <나이브스 아웃>은 그런 의미에서 추리 영화가 가질 수밖에 없는 뻔한 요소들을 새롭게 풀어내고 변주해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하나하나 치밀하게 짜여 변주되는 이야기를 따라 영화의 결말에 다다르는 순간까지 영화의 전개를 쉽게 예측하거나 긴장의 끈을 놓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의 탐정은 여느 잘 만든 추리 영화에서 볼법한 카리스마 있는 명탐정들과는 자못 다르다. 블랑은 자신이 나서서 활약하기보다 마르타에게서 한 발 떨어진 위치에서 그의 행동을 지켜보며 사건의 실마리를 조합해나간다. 영화에서 마르타는 블랑의 조수와 같은 위치에서 그를 돕지만, 결론적으로는 블랑이 마르타의 조수가 되는 셈이다.


사건의 전후 사정이 대강 밝혀졌을 때 블랑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런 편견 없이 사실들을 관찰한 후 포물선의 경로를 밝혀내고 종착점으로 유유히 가보면 진실이 내 앞으로 떨어집니다.” “옳고 그름의 모호한 경계는 진실이 아니라, 찾아낸 진실을 쓰는 방법에 있죠.” 자신의 입을 통해 밝히듯 이 영화의 탐정 블랑은 사건을 파헤쳐 진실을 찾아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앞으로 떨어진 진실을 올바른 방식으로 쓰는 사람인 것이다. 후반부에는 직접 나서서 사건의 경위를 추리하기도 하지만, 그 전까지 그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마르타와 트롬비 가(家) 사람들을 바라본다.

트롬비 가 사람들은 현대 미국사회에 존재하는 모순의 축소판처럼 여겨진다. 이민자를 대하는 태도부터가 그렇다. 가족 모두가 마르타를 가족처럼 여긴다 말하지만, 아무도 마르타의 출신지가 어디인지는 모른다. 에콰도르, 파라과이, 우루과이, 심지어 브라질이라고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할란과 무척 사이가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할란의 장례식에는 초대하지도 않았으며, 장례식 후 집을 방문한 마르타에게 당연한 듯 컵을 내가도록 하며 가정부 취급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상속 이후에도 마르타를 보호하고 지원해주겠다고 말하던 가족들은 상속자가 마르타로 밝혀지자 돌변하며 영화의 제목(Knives Out)처럼 마르타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칼을 뽑아 든다.


블랑이 본격적으로 사건 해결에 개입하기 시작하는 순간은 바로 이때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할란이 죽은 것이라고 믿던 마르타가 자신의 실수를 밝히려고 하는 순간, 블랑은 그런 그녀를 막으며 그들의 모순을 지적하며 진짜 범인을 공개한다. 제 무덤을 판 범인 랜섬이 빠져나갈 공간이 좁아진 올바른 때에 올바른 방식으로 진실을 써 마르타의 무죄를 증명하고 트롬비 가의 모순을 지적한 것이다.
더 이상 자신들의 집이 아니게 된 상황에서 이 집은 선조들이 살아온 우리 집이라며 고함을 지르는 랜섬에게 이 집은 댁의 할아버지가 1988년 파키스탄 사업가에게서 매입했던 것이라고 말하며 트롬비 가의 근본적 모순을 까발리기까지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함께 생각해 볼 것은 그렇다면 할란은 이런 그들과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할란은 곤란에 처할 마르타를 위해 순간의 묘안을 떠올려 마르타를 도운 인물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돌발적 행동으로 인해 마르타를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인물이기도 하다. 만약 영화의 결말이 할란의 계획을 따랐던 마르타의 행동을 블랑이 밝히는 식으로 진행됐다면, 영화는 부유한 백인 남성이 이민자 간병인을 구원해주는 구조로 보이는 오점이 남기며 끝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그런 오점을 남기는 대신, 마르타가 할란의 계획을 능동적으로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극을 전개해나간다. 랜섬의 술수 또한 마찬가지다. 랜섬이 부린 술수들은 마르타의 성실과 선한 마음으로 인해 무력화된다. 자신의 간병인으로서의 직무에 성실했던 마르타는 약품 통이 서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상시의 성실함으로 인해 무의식 중에 원래의 약품을 올바르게 주사하고,자신이 살인죄로 감옥에 가게 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위보다도 가정부의 생명을 택해 가정부를 살리며 랜섬의 계획을 망친다.

할란과 오목을 둘 때 마르타가 하는 말 “전 승리보다 아름다운 패턴을 우선시하거든요.” 처럼 영화는 마르타의 승리보다도 아름다운 패턴 즉, 그녀가 승리하는 과정을 우선시한다. 마르타가 직접적으로 한 방을 먹이는 식의 결말이 나지는 않지만, 모든 칼들의 겨냥하는 대상이던 마르타는 끝내 자신의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 승리한다. 그 시작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끝에 모든 것을 거머쥔 자는 진실하며 선한 마르타다.


결국에는 권선징악(勸善懲惡), 인과응보(因果應報), 자업자득(自業自得) 등의 진부한 결말로 끝난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는 영화이지만, 한 단계 한 단계의 과정을 중시하며 목표했던 목적지까지 끝내 도달하고야 마는 이 영화의 포물선은 참으로 진실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심한 시선에서 피어나는 연대의 감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