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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시코기 Jan 08. 2020

세심한 시선에서 피어나는 연대의 감정

<윤희에게> 2019, 임대형 감독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윤희'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편지를 몰래 읽어본 딸 '새봄'은 편지의 내용을 숨긴 채 발신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의 여행을 제안하고, '윤희'는 비밀스러웠던 첫사랑의 기억으로 가슴이 뛴다. '새봄'과 함께 여행을 떠난 ‘윤희’는 끝없이 눈이 내리는 그곳에서 첫사랑을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는데...



<윤희에게>는 느린 호흡 속에서 담담하고 섬세하게 인물들을 그리는 시선이 돋보이는 영화다. 일단 영화를 보고 이 감독의 앞으로의 행보를 눈여겨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남성 감독이 성소수자인 여성 인물 개인의 이야기를 모녀간의 유대관계와 연결 지어 이토록 훌륭하게 풀어냈다는 점에 임대형 감독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일부 퀴어 영화에서 범해지는 성소수자 여성을 타자화하는 시선이 영화의 한 장면에서도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영화에 가졌던 약간의 걱정과 의심을 강한 만족과 믿음으로 바꾸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영화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구내식당 직원으로 근무하며 딸 새봄과 함께 살고 있는 윤희는 평범하게 별 탈 없이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어딘가 외롭고 힘들어 보인다. 그늘져 있는 얼굴에는 지쳐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하루하루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전봇대 앞에서 휴식 차 피우는 담배 한 개비도 일상의 루틴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의 삶은 단조롭고 생기 없어 보인다. 쥰 또한 마찬가지다. 수의사로 자신의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쥰은 고모와 함께 살고 있다. 둘 사이는 유사 모녀관계로 보일 정도로 다정다감하지만 쥰은 고모를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날이 서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날 지인을 소개해준다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아마도 좋아한다고 고백을 할 것 같았던 병원 고객에게는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며 비밀을 밝히지 말라 냉정히 충고한다.

삶의 이유 중 하나였던 사람을 타의에 의해 잃어버린 후, 불행을 당연시하며 외롭고 갑갑하게 살아온 것처럼 느껴지는 그들의 삶은 그들 곁에서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길을 통해 다시금 조명되고 회복된다.


영화는 윤희의 딸 새봄이 윤희에게 온 편지 한 통을 읽는 목소리로 시작된다. 그 편지의 진짜 발신인이 조카의 편지 수신인 명을 본 후 우체통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편지를 부쳐버린 쥰의 고모 마사코임을 아는 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엄마 윤희에게 온 편지를 보다 먼저 본 새봄은 대학 입학 전 여행을 핑계로 엄마와 엄마의 첫사랑 간의 재회를 비밀리에 주선하고, 고모 마사코는 윤희의 딸이 오타루에 왔다는 사실을 쥰에게 알린다. 쥰의 부치지 못한 편지를 부쳐주는 고모 마사코와 용기를 내지 못하던 윤희를 쥰에게 데리고 가는 새봄의 도움은 윤희와 쥰에게 구세대와 신세대가 건네는 도움의 손길처럼 느껴진다.

로드무비, 성장 영화, 퀴어 영화, 여성 영화 등 이 영화를 수식할 단어는 무궁무진하겠지만, 그 많은 단어 중에서도 ‘연대 영화’라는 단어로 이 영화를 칭하고 싶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느껴지는 인물에 대한 카메라의 따뜻한 시선과 묘사는 윤희와 쥰, 그리고 그들과 같은 시대의 폭력에 길들여지고 억압됐던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연대의 손길로 여겨진다. 결국 영화 <윤희에게>는 윤희와 쥰의 편지와 같이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안고 살아온 이들의 고통의 종결을 간절히 바라며 그들에게 보내는 신세대의 위로와 구세대의 사과의 편지이자 모두의 연대를 바라는 바람이 아니었을까.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영화에는 포옹 장면이 세 번 등장한다. 하나는 고모가 쥰을 안아주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윤희가 전남편을 안아주는 장면, 마지막 하나는 새봄이 경수를 안아주는 장면이다. 어색해 하면서도 쥰을 꼭 안아주는 고모의 모습은 쥰의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위로이자 이해의 포옹으로, 결혼을 한다며 청첩장을 가지고 온 전남편을 안아주는 윤희의 모습은 어쩌면 또 다른 피해자였을 인물이 이제라도 더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의 포옹으로, 문득 경수를 안아주는 새봄의 모습은 순수한 사랑의 감정 그 자체로 느껴졌다.

윤희와 쥰의 재회는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생기를 잃고 날이 서있던 둘의 삶에는 다시금 서로의 존재로 인한 활기가 생겨났고, 그와 동시에 하늘의 달빛 또한 조금씩 차올랐다. 영화의 마지막, 둘의 재회 장면에서 하늘의 달은 만월(滿月)을 이루며 세상 무엇보다도 밝게 떠있다. 영화에 단 하나의 플래시백 장면도 등장하지 않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의 그리운 감정과 해후의 기쁨을 느끼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별다른 말없이 서로의 곁에서 묵묵히 걷는 둘의 모습에는 슬픔의 기운보다도 재회에 대한 기쁨의 감정이 가득하다. 재회 후 한국에 돌아온 윤희의 일상은 평소와 별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이전처럼 외롭거나 각박해 보이지 않는다. 오빠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꿈꾸며 이력서를 당당하게 채워 넣는 윤희의 모습에는 은은한 희망이 묻어난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이자 독백인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보다도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윤희의 목소리가 귀에 희망차게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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