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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시코기 Feb 24. 2020

미상(未詳)이기에 비로소 완성되는 진실한 예술

<작가 미상> 2018,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전후의 독일, 젊은 화가 '쿠르트'(톰 쉴링)는 죽은 이모와 같은 이름의 여인 '엘리'(파울라 비어)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독일민주공화국(동독)에서의 생활에 한계를 느낀 두 사람은 서독으로 도피해 새삶을 꾸린다. 새롭게 들어간 예술학교에서 창작에 몰두하던 쿠르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점차 진실에 다가가게 되는데...



"눈길 돌리지 마. 진실한 건 모두 아름다워."


영화는 2차 세계대전 말 독일 드레스덴에서 열리는 어느 전시회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표현하지 않는 형식주의는 의미 없고 외설적인 퇴폐 예술이라며 전시된 작품들을 깎아내리는 도슨트의 설명 후, 엘리자베트 이모는 쿠르트에게 눈길을 돌리지 말라 이야기한다. 짐작건대 이때의 기억은 그가 이후에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의 시작점이 됐을 것이다. 어떤 것에서든 눈길을 돌리지 않는 것, 이것은 그가 주변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된다. 이때부터 쿠르트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에서 눈을 돌려 피하지 않고 목격한다.

엘리자베트는 쿠르트의 예술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겹쳐지는 버스 경적음에서 화음을 느끼고 사진과 그림으로 인물의 배경을 추측하는 모습에서 엘리자베트에게도 잠재된 예술성이 있었음을 어느 정도 추측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쿠르트의 곁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엘리자베트는 총통에게 꽃다발을 전해주는 임무를 수행한 뒤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해 정신병원에 가게 된다. 그녀는 진료한 의사의 신고로 병원에 끌려가 불임수술을 받은 뒤 인종 정책에 따라 제거 대상자로 분류되어 죽게 된다. 그리고 이때 쿠르트의 어머니는 정신병원 호송차에 끌려가며 버둥대는 엘리자베트를 못 보게 하기 위해 쿠르트의 눈을 가린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며 그녀를 보는 것을 피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눈앞을 손으로 가려본다. 그리고 다시 손을 내린다. 그 순간 이모가 끌려가고 있는 눈앞의 광경이 흐리게 보인다. 그는 그녀가 그에게 말했던 대로 그 모습을 흐리게라도 목격한다.



제반트와 쿠르트


시간이 흘러 청년이 된 쿠르트는 예술학교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자신의 이모와 이름이 같은 엘리를 만나게 된다. 정작 쿠르트 본인은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엘리는 자신의 이모 엘리자베트를 제거 대상자에 넣어 그녀를 간접적으로 죽게 만든 의사 제반트 교수의 딸이라는 것을 관객은 알 수 있다. 쿠르트는 이 사실을 모른 채 엘리와 점점 사랑에 빠지게 된다.

제반트 교수와 쿠르트는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 우선, 제반트 교수는 나치의 붕괴 이후 체포되어 처벌될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을 체포한 소련 장교의 아내의 난산을 돕는다. 자신을 왜 돕냐고 묻는 소련 장교의 물음에 그는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것이라 답한다. 쿠르트 또한 포스터 문구를 한 붓에 그리는 자신을 보며 잘난 체하는 거냐며 비아냥대는 동료의 물음에 자신은 할 수 있으니 하는 것이라 답한다. 또한 제반트 교수는 자신을 제반트 씨라고 부르면 제반트 교수라 부르라며 자신에 대한 호칭을 정정한다. 쿠르트는 제반트를 처음 만났을 때 벽을 페인트칠 하고 집세에서 빼면 되겠다는 그의 말에 자신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답한다. 제반트가 그럼 어떤 화가냐고 되묻자 그는 자신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고 답한다. 엘리에 대한 호칭 또한 마찬가지다. 쿠르트는 자신의 이모와 이름이 같다는 사실에 엘리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녀를 엘리자베트라 부르지는 못한다. 대신 그녀에게 다른 호칭이 있냐고 물어본다. 그때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엘리라고 부른다고 답한다. 그리고 쿠르트는 제반트가 그녀를 부르는 방식대로 그녀를 엘리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이렇게 제반트 교수와 쿠르트는 공통되는 부분이 많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 유형의 인물이다. '할 수 있기 때문에 한다'는 말에서부터 생각해보자. 제반트 교수가 소련 장교를 도운 것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우러나온 행동이 아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소련어를 틈틈이 공부하며 기회를 엿보았고, 자신의 눈 앞에 떨어진 기회를 잡았을 뿐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그렇다면 쿠르트는 어떠한가. 쿠르트는 포스터의 문구를 한 붓에 그린다. 그의 동료가 자랑질을 하려고 그러는 것이냐 묻자 그는 자신은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 답한다. 제반트와 달리 그에게는 행동에 대한 다른 동기가 없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기에 하는 것일 뿐이다. 엘리에 대한 태도 또한 그렇다. 제반트 교수는 얼핏 보면 딸을 매우 아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는 엘리가 쿠르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눈치챈 후부터는 딸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 심지어 없는 병을 지어내기까지 하며 딸이 임신 중인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없애는 일까지 자행한다. 그에 비해 쿠르트는 엘리를 사랑하는 존재다. 그리고 그녀와 하나가 되는 사람이다. 영화에는 두 사람이 한 몸처럼 겹쳐지는 장면이 여럿 등장하기도 한다. 쿠르트는 그녀와 몸이 겹쳐질 때 한 몸처럼 느껴져 좋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낙태수술에 의한 후유증 때문에 아이가 생기기 힘든 악조건에 처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아이를 갖게 되고, 그 아이를 무사히 낳는다. 자신의 딸의 아이를 없앤 제반트와 달리 쿠르트는 자신과 엘리의 아이를 지켜낸다.



진실한 예술


쿠르트는 동독에서는 자신의 작품 활동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체감하고 서독으로 넘어간 뒤 새로운 예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기존에 동독에서 배우고 그려오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부정하던 개념들을 받아들이며 보다 개인적이고 형식적인 차원의 예술을 시도하게 된다.

어느 날, 수업 중 그의 말에 감명을 받은 페르텐 교수는 그의 작품을 보고 싶다고 말하고, 쿠르트는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작품들을 모아 그에게 보여준다. 교수는 쿠르트의 작품들을 살펴본 뒤 자신이 펠트와 지방으로만 작업을 하게 된 이유를 들려주며 그의 작품들은 그답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교수의 말을 들은 후 쿠르트는 고뇌하며 몇 날 며칠을 캔버스 앞에서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제반트와의 식사 도중 둘은 나치의 인종정책을 주도한 주모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제반트는 놀라 자리를 뜨고, 쿠르트는 신문에 실린 주모자의 사진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가져와 자신의 캔버스에 격자를 그려가며 최대한 똑같이 그린다. 그림을 완성시킨 그는 문득 과거에 손을 올렸다 내려 이모를 흐리게 보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사진을 맨 붓으로 덧칠해 흐릿하게 만들기 시작한다. 그 방식으로 그림을 완성한 뒤, 그는 제반트의 여권사진을 비롯한 다른 그림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완성시키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갑자기 부는 바람에 아틀리에의 창문이 여닫히게 되고, 영사기에서 비추어진 제반트의 여권 사진이 그가 그린 그와 이모의 사진 위에 겹쳐지게 된다. 마침 그 순간 제반트가 아틀리에로 들어오고, 그는 그림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성급히 자리를 뜬다. 하지만 정작 쿠르트는 그가 자신의 그림을 보며 놀란 원인을 알아채지 못한다. 흐릿한 그림만이 그곳에서 과거의 비밀을 선명하게 알려줄 뿐이다.

쿠르트는 같은 기법으로 그린 작품들로 자신의 첫 작품전을 열게 된다. 그리고 작품전을 여는 당일, 자신과 이모의 그림 위에 제반트와 나치 주모자의 얼굴을 덧대어 그린 그림을 페르텐 교수에게 보낸다. 그림을 본 교수는 흡족하게 웃는다. 이 미소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쿠르트가 보이는 미소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쿠르트는 작품전에서 기자회견을 마치고 곧장 버스 차고지로 간다. 그리고 엘리자베트가 버스 기사들에게 부탁해 경적 소리가 겹쳐지는 것을 듣던 것처럼 버스의 경적음들이 겹쳐지는 것을 듣는다. 경적소리의 화음을 느끼던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그가 그의 이모 엘리자베트가 말했던 '진실된 것', 바로 그 '아름다운 것'에 도달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그가 제반트 교수와 다른 인물이라는 것 또한 느낄 수 있다. 그는 그의 주변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을 목격했음에도 그 내막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비로소 '작가 미상'의 그림을 완성시킨다. 이때, 그가 할 수 있기에 하던 그림의 의미는 변화한다. 그가 할 수 있기에 하던 그림은 이제 그가 해야만 하는 것이 된다. 마침내 그는 그가 해야만 했던 그림 즉, 진실한 예술을 완성시킨다.




아래 링크의 글과 동일합니다.


https://m.cafe.naver.com/ca-fe/web/cafes/25494727/articles/7555?fromList=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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