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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시코기 Mar 02. 2020

잊힌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기억의 전쟁> 2018, 이길보라 감독




매년 음력 2월이면 베트남의 마을 곳곳에서 향이 피워진다. 1968년 한날 한시에 죽은 마을 주민들을 위해 살아남은 이들은 위령비를 세우고 50여 년간 제사를 지내왔다. 그날의 사건으로 가족들을 모두 잃은 탄 아주머니, 그날의 현장을 똑똑히 목격한 껌 아저씨, 그날 이후 전쟁의 흔적으로 두 눈을 잃은 럽 아저씨는 지금껏 잊지 못한 기억을 꺼낸다.



"할아버지는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그런 건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라 했다. 학교에선 베트남 참전으로 경제발전을 할 수 있었다고 배웠다. '양국이 불행한 역사를 겪었다'고 대통령은 말했지만 그 불행한 역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이길보라 감독-


서로 다른 기억들이 교차한다. 학살에서 살아남았지만 가족들을 잃은 사람들의 기억, 학살에 가담했던 한국 참전군인들의 기억 그리고 한국 정부의 기억이 있다. 이들의 기억은 제각각 너무나 다르다. 누군가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지만 누군가의 기억은 뿌옇게 흐리기만 하고, 또 누군가의 기억은 다른 기억과 어긋나 있다. 영화 <기억의 전쟁>은 이 서로 어긋나 있는 기억들에 주목한다. 영화의 제목 '기억의 전쟁'은 생존자들이 여전히 남아있는 생생한 기억과 투쟁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런 서로 다른 기억 자체의 충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만든 이길보라 감독은 1971년 봄 베트남전에 장교로 파병됐던 참전용사의 손녀다. 그는 유년기부터 할아버지의 훈장들을 보며 자연스레 자랑스러운 일로만 알았던 베트남전쟁의 역사를 알아가면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과 진상규명 과정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 영화의 시작점이었음을 밝혔다. 감독은 약 4년간 베트남과 한국을 오가며 마을에 남아있는 생존자들의 목소리에 집중해 그것을 최대한 그대로 전달하고자 노력하며 영화를 찍었다.

영화는 참전군인이나 한국 정부, 한국의 입장이 아닌 당시 사건의 생존자들의 입장에서 진행된다.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남아 지난 50여 년을 살아온 응우옌 티 탄 아주머니, 전쟁의 흔적으로 시력을 잃은 응우옌 럽 아저씨, 당시 사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딘 아저씨. 세 사람의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영화 안에서 다시금 분명히 이야기된다. 그들의 목소리와 더불어 영화에서는 현재와 과거의 상황이 반복적으로 묘사된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과거의 기억이 그대로 남아있는 마을 곳곳의 현재 모습이 비춰지고, 과거 작전 당시의 한국군의 모습은 관련 조형물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재현된다.

참전군인의 시선을 담아내는데 중점을 두지는 않지만 영화의 중간중간 참전군인들의 모습 또한 비춰진다. 그들은 자신들은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국가에 의해 내려온 작전에 따랐을 뿐이라며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되려 호소하고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거짓이라 치부한다. 또한 그들은 응우옌 티 탄 아주머니가 참석한 시민평화법정에 참석은 하지만, 자리를 잡고 앉아 그들을 빤히 쳐다보거나 딴청을 한다. 영화는 이런 그들을 잠시동안 카메라에 비추며 그들의 모순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동시에 그것을 통해 참전군인 전체를 가해자로 보는 시선은 경계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점은 인물보다도 훈장이나 명찰, 군복과 같은 국가와 관련된 상징물들을 비추는 영화의 시선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한 일을 아이가 책임져야 하나? 그럴 순 없지. 누가 그 죗값을 갚을 수 있겠어. 젊은 세대들은 아무것도 몰라. 내가 너희들에게 분명히 말했어, 그러니 됐어. 사실대로 말했고, 그저 이야기했을 뿐이야."
                                                                          -응우옌 럽-


전쟁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일어났는데,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그렇다면 그 모든 사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문제까지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생존자들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며 여전히 당시의 생생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데, 그들의 아픔을 인정하고 보상해야 할 대상은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시민평화법정이 열린다. 법적 효력은 물론 없지만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의 진상규명을 해보는 모의법정이 진행된다. 재판부는 국가차원에서 사건을 조명하고 밝히지 않아 사건이 묻혔다는 사실을 조명하며 국가 정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영화는 결국 이 질문을 던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적인 진상규명은 여전히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해야 하는가 하는 것. 외면 받던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며 사려 깊은 시선에서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집중해 듣고, 그것을 계속 기억하려는 영화의 태도와 그속에서 보이는 시민들의 노력이 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래 링크의 글과 동일합니다.

https://m.cafe.naver.com/ca-fe/web/cafes/25494727/articles/7562?menuid=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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