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를 빌미로 한동안 아무 일 않고 지냈습니다. 무엇을 할 짬도 없었지만요. 황당하고 속상한 상황에 격한 감정이 섞인 글임에도 따뜻한 위로와 쾌유를 빌어주신 여러 브런치 이웃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뜻밖의 사고는 약 한 달간 생활의 공백을 가져왔지만 평소와 다른 생각을 할 시간도 주었습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환기랄까요? 나와 가족 누군가가 아프면 어떤 모습으로 내 생활이 전개될 것인가? 그런 상황에서 정원은 또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인가? 시골에서 혼자 사는 것은 과연 평온한 삶인가? 뭐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겪어보니 사소한 성가심으로도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이더군요. 우리의 일상은 무난한 매 순간들이 받쳐주지 않으면 엉망이 되고 맙니다. 내 생활, 내 인생을 만든 것이 바로 나라는 착각은 애초에 허상이었구요. 우연 같은 작은 운들이 더께로 쌓여 지금의 시간이 허락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을 땐 다소곳이 무릎이 모아졌습니다.
어느덧 1년이 지났네요. 5도 2촌의 띄엄띄엄 시골 생활에서 붙박이로 바뀐 것이 작년 이맘때였습니다. 줄곧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가치 있는 일에 대한 그간의 생각도 달라졌습니다. 돈 대신 시간을 손에 쥐게 되면서 글과 음악, 집안일과 정원을 가꾸는 것에 몸과 마음을 쓸 수 있음이 각별하게 느껴졌습니다. 일상의 사소한 기쁨에 매료되었달까요?
스스로를 건사하며 생겨난 자신감은 불쑥 행복한 감정으로 터져 나오곤 했습니다. 삼시 세끼와 빨래, 청소 등 집안일을 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가기 일쑤고 어느덧 저녁놀도, 휘영청 달빛도 심드렁해질 만큼 익숙해졌습니다. 이처럼 싱거운 하루 일과에 정원과 음악은 양념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심신에 약이 되는 ‘藥念’.
쑥부쟁이, 구절초를 쓰다듬으며 이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를 흥얼거립니다. 정훈희의 ‘꽃밭에서’라는 노래죠. 조선 초기 이조참의를 지낸 최한경이 지은 한시 ‘화원(花園)’을 작사가 이종택이 한글로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坐中花園 膽彼夭葉(좌중화원 담피요엽)]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兮兮美色 云何來矣(혜혜미색 운하래의)] 아름다운 꽃이여, 꽃이여 [灼灼其花 何彼(艶)矣(작작기화 하피염의)]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斯于吉日 吉日于斯(사우길일 길일우사)]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美人之歸 云何之喜(미인지귀 운하지희)]
지난 계절에는 다양한 꽃씨를 모종으로 키워 어떤 꽃이 정원에 어울리고 잘 자라는지 공부했고, 꽃밭을 세 군데 새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대형화분에 수생식물 키워보았고, 텃밭에는 어떤 작물을 얼마만큼 심는 것이 좋은지 새롭게 정리했습니다. 가지치기도 어느 정도 해놓아서 이젠 해마다 조금씩 다듬어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시골살이는 글과 음악을 친구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긴 겨울과 장마, 해지고 난 후의 온전한 밤은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을 듬뿍 안겨주었고 음악을 곁에 앉혔습니다. 도시에선 일과 TV에 가로막혔던 독서와 음악이었는데, 이곳에 와서 내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는지 또 세상에는 얼마나 좋은 책이 많은지 새삼 알게 됐습니다.
개인적 취향이긴 하지만 고령화된 시골은 고독한 사회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 같아요. 풀, 꽃, 나무, 벌레처럼 소리 없는 생명들과 삶을 같이하는 자발적 고립 말이죠. 연결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불안감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1인 가구가 넘쳐나도 삶의 만족도가 매우 높은 나라가 많은 것을 보면 고독을 사전적 의미로만 볼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최근 방송에서 시골 생활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가끔 접하게 됩니다. 이웃들과 어울려 야외에서 식사하는 장면을 꼭 끼워 넣는데, 취지는 알겠지만 시골에 내려와서 또 다른 관계 설정이나 유지를 위해 과도한 신경을 써야 한다면 그것도 부담스러울 것 같아요.
아마도 이런 것이 노명우 교수가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에서 말한 ‘집단주의의 판단에 맞춘 개인들의 표준적 삶의 궤도’가 아닐까 싶은데요. ‘사람은 서로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것에 왜?라는 질문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사회의 오래된 판단에 일방적으로 순응하는 태도가 바람직한 시골의 미래에 부합하는지도요.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다 보면 가끔 이런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날로 먹으면 될 것을 굳이 요리를 해 먹겠다 하고, 대충 걸치면 될 것을 차려입으려 하니, 먹고 씻고 치우느라 네 인생에 허락된 시간을 모두 허비하는구나.” 인간이 추구하는 문명이란 것이 대체로 그렇죠. 격식을 갖추려다가 새로운 불편의 덫에 갇히고 맙니다.
정원을 돌보면서 경계심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아름다운 정원에 대한 욕심인데요. 물론 맘에 드는 정원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고 동기부여가 되지만, 수목원이 아닌 내 정원에 인정과 보상을 개입시키면 음식보다 그릇에, 옷보다 치장에 매몰되는 꼴이 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그러니 노력하기보다 애정으로 대하자고 되뇌곤 합니다. 아니 재미로 해야지요.
조만간 배추와 무를 뽑아 김장을 해야겠죠? 작년엔 한 해 텃밭 농사의 끝이 김장이었습니다. 올해는 텃밭 한편에 비닐 터널을 만들어 가을 감자를 심어놓았습니다. 옥수수를 뽑은 자리엔 양파를 심었고요. 이상 기후로 텃밭의 작황이 좋지는 않지만 이런저런 실험을 해볼 수 있는 땅이 있어 즐겁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치료는 생명을 위협하는 신체적 정신적 충격을 준 사건으로부터 뇌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감정을 다독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원 속에서 교통사고로 위축된 마음의 치유를 바래봅니다. 다행히 기댈 곳이 있는 정원생활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