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하루해는 짧아지고 밤이 길어졌다. 추분이 아직 열흘이나 남았건만 절기보다 피부가 먼저 느낀다. 오래 끌던 더위도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에 길을 내주었다. 도시의 불빛은 아직 모를 것이다, 새벽녘이면 이불을 턱까지 끌어당기는, 여기에 훌쩍 다가온 계절의 발걸음을.
뚜벅뚜벅 정원으로 나서는 걸음에 스스럼이 없다. 어느덧 힘 빠진 햇살이 더 이상 해치지 못할 것을 알기에 두려움 없이 그 속으로 들어선다. 가을 준비에 꽃잎을 떨군 봉선화와 플록스, 피었던 그 모습 그대로 쇠잔하여 박제된 과꽃과 백일홍, 아랑곳없이 여전한 메리골드와 새깃유홍초를 어루만진다.
따스한 햇볕 아래 호랑나비, 제비나비, 이름 알지 못하는 나비들이 꽃잎을 어르며 날갯짓한다. 이리저리 따라나선 내 시선이 쨍한 햇살에 눈이 먼다. 이렇게 눈 감으면 나비가 되어 훨훨 나는 꿈을 꿀 수 있을까? 들판의 벼는 서걱거리며 노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자두나무잎이 떨어져 잔디 위에 뒹굴고 복분자도 이미 잎을 떨구었다. 오이와 호박은 누더기 이파리 속에 숨긴 채 열매를 만들어 내고, 군데군데 붉게 물든 고추에 깜짝깜짝 놀란다. 길게 뻗은 고구마 넝쿨 아래 실하게 밑이 들기를 바라는 마음이 익어가고, 이렇게 가을이 올 것을 믿고 무와 배추를 심었다.
잘 익은 포도송이를 움켜 쥔 순간 깜짝 놀란 고양이 한 마리가 줄행랑친다. 한결 부드러워진 갈볕에 볕내음 맡으니 졸음 겨웠으리라. 설익어 푸른 밤송이와 감이 떨어져 뒤뜰 풀밭에 나뒹군다. 매달려 살아남은 것들은 옹골지게 씨앗을 부풀리며 결실의 계절로 들어서고 있다.
키 큰 나무 꼭대기가 푸르러 높아진 하늘 끝에 닿으면 유난히 하얀 구름이 크게 숨을 들여 마시고 길게 내쉬고, 난 고개를 들다가 한 손에 쥔 호미를 늘어뜨린다. 호수는 산과 숲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붙잡아 둔 채 하늘과 구름을 비춘다. 언제부터였는지 왜 모르고 있었는지.
어느덧 서쪽 하늘이 붉은 구름으로 물들면 탄성은 나도 몰래 터진다. 하루가 금방이다. 여전히 먹을 것이 많은 거미는 곳곳 몰래 그물을 쳐놓았지만 이슬 매달아 들키게 될 날도 머지않았다. 한 해도 금방이겠지.
어둠은 서둘러 뛰지 않는다. 땅거미 으슥해지면 안온한 전구색 정원등이 하나 둘 밝혀지고, 풀벌레 소리를 묻히며 사부작사부작 다가온다. 언젠가는 알게 될 날이 올까? 소리 하나하나에 생명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날 말이다.
어둠 속에서 가을을 그린다. 아직 여름꽃 한창이지만 가을엔 또 가을의 꽃이 필 것이다. 꽃무릇과 구절초가 앞서고 쑥부쟁이와 해국이 뒤를 이어서. 감나무, 밤나무, 모과나무 익어가는 열매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며. 요차불피(樂此不疲), 좋아서 지칠 틈 없는 정원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