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사랑으로 잊어야 한다던가?
여주 집 매도 계약 후 두 달 만에 오백 평의 전원주택을 샀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지 420평과 임야 80평. 건평 50평의 단층 조적조 슬라브 주택과 25평의 별채. 보령호 옆에 잔디마당이 있고 뒤뜰에 과실수가 심어진 남향의 너른 집이다. 한 시간 차이가 이렇게 큰가 싶었다. 차로 한 시간 거리의 수도권에 비해 두 시간 거리인 보령, 부여, 청양 등지의 부동산 가격은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수도권에서 찾아가 본 집들도 시내와의 거리나 편의시설과의 접근성이 떨어지기는 매일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면적에 비해 그렇다는 거지 퇴직금은 푹 줄었다.
전원주택을 살 때 눈여겨볼 것이 몇 가지 있다.
당시 내 맘 속엔 마당 넓고 경치 좋은 집이 최우선이었지만 두 달간 주말마다 두루 다녀보니 보는 눈이 점점 틔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선입견도 있으니 참고만 하길 바란다. 인근에 축사, 송전탑, 공장 등의 시설이 있거나 가구수 많은 마을 한가운데, 반대로 으슥하고 너무 외딴집, 주차공간이 일정치 않은 곳은 피했다. 지적도상 경계가 실제와 차이가 심한 곳도 분쟁의 여지가 있으므로 제외했다. 전망은 좋지만 가파른 경사지에 위치하거나, 논밭이 너무 가까운 곳도 냄새와 소음에 민감한 사람에게는 좋지 않다. 샌드위치 패널로 지어진 이른바 조립식 주택도 비추천. 외부 수도시설과 창고, 가로등이 있는지 확인하고 벽과 옥상의 균열, 창호의 상태를 꼼꼼히 살핀다. 그밖에 겨울철 난방요금이 많이 나오는 집은 단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시골 주택의 가격은 에누리가 상당하다.
도시와 달리 시세가 고르지 않아 중개업자와 잘 상의하면 흡족한 절충을 기대할 수 있다. 잔금을 치르기 전에 가능하면 직접 찾아가 이사하며 남기고 갈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상의한다. 나는 싼 가격에 tv와 냉장고, 돌침대, 농기구, 가스 등을 넘겨받았는데 가스는 고맙게도 1년 넘게 쓰고 있고 농기구도 요긴하게 사용 중이다. 그 밖에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두고 작동법이나 비상시 연락처 등을 꼼꼼히 메모해 두는 것도 중요하다. 여름에 집을 사면 겨울에 쓰는 시설이, 겨울에 사면 여름에 쓰는 물건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보일러, 에어컨 등이 대표적이다. 꼼꼼히 체크해놓지 않으면 나중에 당황하게 된다.
필요한 중고가구는 당근마켓에서 사다가 날랐다.
갖고 있던 9인승 승합차의 뒷좌석을 탈거하고 검사를 받아 짐차처럼 사용하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용달을 이용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컸을 테니 말이다. 쓸만한 물건들을 헐값에 살 수 있어 보물창고의 열쇠처럼 앱을 눌러댔다. 다양한 디자인의 콘솔을 여러 개 사서 넓은 거실 곳곳에 배치하고 그림을 걸어두니 한결 아늑해졌다. 탁자와 의자는 데크와 선룸, 거실과 주방 등에 필요해서 여러 세트를 구매했다. 마당에 놓인 철제 테이블, 손님용 간이침대, 보조 난방용 가스난로도 당근에서 구입했고, 화장대, 책상과 책꽂이, 옷걸이, 각종 캠핑용품 등 다양한 물품들을 마련했다. 지금 쓰고 있는 노트북도 당근에서 대면거래로 산 것인데 나쁘지 않다.
이삿날 잔디마당. 6반송, 3단풍, 2배롱, 2향나무, 2동백, 2회양목, 2장미, 오엽송, 모과, 자두, 꽃사과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처음엔 바라만 봐도 좋았다.
풀, 꽃, 나무의 이름도 모르지만 보기에 좋으니 됐다. 마당에서 올려다보는 하늘과 구름이 좋았고 휘영청 달밤과 별자리 찾기도 더할 나위 없었다. 잔디 깎기도 예초기도 처음 써보는 것이라 어설프고 힘들었지만 밥시간을 잊을 만큼 몰입했다. 유월이라 잔디와 잡초가 쑥쑥 자라서 풀 깎는 일만으로도 주말이 다 갈 정도였지만 처음이라는 마법에 걸려 힘든 줄 몰랐다. 마침 매실과 보리수가 빼곡히 열렸고 가족과 함께 수확하는 기쁨에 행복했다. 8월 말엔 작은 텃밭에 배추 모종을 심고 무 씨앗을 파종했다. 텃밭틀도 만들고, 집 뒤 아미산을 올라보기도 하고, 충청수영성과 갈매못성지 등 인근 명소 나들이도 했다. 가을이 오고 또 다른 꽃이 피고 짙은 단풍이 들었다. 낙엽을 모아 살그머니 태웠다. 불길이 잦아든 뒤에도 오랫동안 낙엽 타는 냄새가 남아 좋았다. 뒤뜰에 심어진 밤나무에 밤송이를 털었다. 입을 벌려 반질반질 잘 익은 밤알을 주워 담는데 마치 길에 떨어진 돈을 줍는 기분이었다. 며칠 후엔 주렁주렁 주홍색으로 익은 감을 땄다. 요령이 없어 떨어뜨리는 바람에 깨지기도 했지만 감사히 홍시를 만들어 먹었다.
금세 겨울이 오고 난방을 해야 했다.
아침저녁 쌀쌀한 기운이 한낮의 햇살을 무색하게 하니 보일러를 점검해야 했다. 방에서 버튼만 누르면 나머지 과정은 몰라도 되는 아파트가 아니므로. 심야보일러는 말만 들었지 처음인 데다 원리도 작동법도 잘 몰랐다.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모르면 돈이 든다는 사실을. 지인의 조언대로 사람을 불러 배관관리를 위한 부식방지제를 넣었다. 그럼에도 며칠 지나 고장이 나서 AS를 신청해 손 봤지만 다시 히트펌프 고장. 생소한 설비와 용어에 그저 멍하니 돈 먹는 하마 입에 신용카드를 디밀 뿐이었다. 이후로는 사람 부르는 일에 좀 더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 먼저 검색하고 공부해서 이해한 후에 조치를 취한다. 그래야 AS기사에게 자세히 물어보고 배우고 요령을 터득해 나중에 혼자서도 할 수 있게 된다.
어느덧 눈 내리고 제법 매운 추위가 찾아왔다.
얼어버린 겨울밤을 녹이려 단풍나무와 주목에 크리스마스트리 전구를 감아주었다. 화목난로에서 고구마 익어가는 달콤한 냄새를 맡으며 2022년 새해부터 주말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반년 동안 인터넷과 유튜브를 뒤져가며 임기응변식 정원관리를 해왔는데 꽃과 나무의 종류가 많다 보니 뒤돌아서면 잊기 일쑤였다. 식물들은 1년을 주기로 생장 휴면하는데 지금 잠깐 아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매주 해야 할 일도 수시로 메모하고 주말에 줄을 그어가며 처리했다. 그리고 한 일들은 다이어리에 기록했다. 도서관에서 정원, 나무, 텃밭에 관한 책을 빌려 도움 되는 것은 발췌하고 사진으로 남기며 공부도 했다.
이제 1년이 지나 다시 겨울이 코 앞에 와 있다.
창 너머 텃밭을 바라보니 배추가 작년보다 훨씬 실하고 통통하다. 적갓도 풍성하게 자라서 김장김치에 맛을 더할 테지. 올해는 저 싱싱한 무청으로 시래기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주말마다 빠짐없이 써 내려간 기록을 보니 녀석들이 저절로 살찐 것은 아니구나 싶어 나 자신이 대견하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전국 곳곳에서 5도 2촌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조건일 테지만 이 글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부분이 있었으면 좋겠다. 또한 은퇴 여부와 상관없이 더 많은 분들이 주말 정원생활자가 되어 어깨동무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1년 주말 정원 생활의 정리가 2도 5촌으로 연착륙하는 발판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