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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스 May 13. 2024

시골집 손님치레, 나중에도 모두 여전하길 바라며

변기가 막혔다. 며칠째 물이 내려가질 않는다. 베이킹소다와 식초, 마트에서 파는 약품까지 써보았지만 요지부동이다. 처음엔 하찮은 일로 시간을 보내는 게 어이없고 짜증 났다. 서서히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으며 무릎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팬티차림으로 중무장(?) 한 채 펌핑하고, 난생처음 관통기도 써봤지만 답답한 한숨만 욕실에 가득하다.


간절함으로 유튜버의 조언을 찾았다. 반신반의하며 변기 청소솔에 비닐을 감아 단호하게 쑤셨다. ‘으아... 제발, 내일 손님이 온단 말이다아앗, 뚫렸다!’ 휴우, 유튜브 선구자분들께 감사드린다. 역시 당해봐야 사소한 행운의 고마움을 알게 된다. 곳곳에 깔린 '다행'이 생활의 어려움을 잊고 살게 한다는 것을.


골프 친구들이 오기로 했다. 한때는 여기저기 골프 여행도 함께 했던 마니아 들이다. 인근의 클럽에서 라운딩 한 후 우리 집에서 묵고 이튿날 한 게임 더 하는 일정이다. 사실 나는 손을 놓은 지 오래다. 이게 휘발성이 강한 운동이라 돈과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데 비해 근육도 기량도 붙어 있질 않는다. 뜰 가꾸는 은퇴자에겐 부담스럽다. 이렇게 일 년에 한두 번 느끼는 손맛으로 족하다.


모처럼의 손님치레에 ‘평소 모습을 보여주자’면서도 어느새 데크 위 묵은 솔잎을 쓸고 있다. 해마다 오는 친구들이지만 가족에게 하듯 허물을 보이진 못한다. 그들의 눈으로 뜰과 집안을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번거롭지만 치레에 더 신경 쓰게 된다. 이건 마치 양면테이프 같다. 무언가를 붙이려면 저 자신도 끈적임을 감수해야 한다. 결국엔 반가움이 성가심을 덮어버리지만 말이다.


하루 종일 어슬렁거리며 송홧가루 덮인 야외테이블을 닦아내고, 잔디를 깎고, 어지러진 농기구와 화분을 정리했다. 햇볕에 넌 이불로 방마다 잠자리를 마련하고 혹시 추울지 몰라 전기요도 깔아둔다. 치울 곳도 많다. 혹시 거미줄이라도 보이면 어쩌나. 세면대가 더러우면 흉볼지 몰라, 하룻밤이지만 불편해하면 어쩌나. 이런저런 마음이 쓰인다. 어쨌든 덕분에 집 안팎이 말끔해졌다.

일 년 반 만에 잡은 골프채치곤 꽤 잘 휘둘렀다. 바닷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밤늦게 집에 돌아와 차와 다과를 들었다. 생각해 보면 아파트에선 생각해 보지 못했을 초대다. 직장 동료들과 집들이를 한 것도 아주 오래된 기억이다. 베란다에서 장어를 굽다가 위층으로부터 항의를 받았었다. 그 후론 언감생심이다.


집밥을 대접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혼자서 장보기, 음식 준비, 상차림과 설거지를 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살림을 해보니 알겠다. 편히 얘기 나눌 맘의 여유가 없다. 이젠 시골도 가정 대소사에 마을회관을 이용하는 추세다. 늙어가고 사라지며 불편이 더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지인들과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이 얼마나 오래갈지 미지수다.


모두 떠나고 나니 아쉬움이 남는다. 아침 일찍 다 같이 마당 순례를 했지만, 뜰을 가꾸는 즐거움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 같다. 밤 뜨락에서 음악을 들으며 담소를 나누지 못한 것도 그렇고. 다음엔 고기라도 구워 소주 한잔 걸칠 수 있으면 좋겠다. 텃밭에서 바로 딴 상추와 채소를 먹이고 싶다. 즐거운 얘기에 새소리를 들으며 별자리를 보다가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어도 괜찮은 시간을 갖고 싶다.


그때는 꽃이 더 만발하기를, 바라보는 내 시선에도 호기심이 여전하기를, 낯선 삶에 대한 두려움과 동경이 교차하는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풀씨 하나 움트기를... 그리고 그때는 변기가 막히는 불상사로 미리 진이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시골집 손님치레, 모두 여전하길 바라는 마음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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