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엔 여남은 그루의 단풍나무가 자라고 있다. 각기 다른 시기에 노랑, 주황, 빨강 등 다른 색깔로 가을을 보낸다. 푸르다가 가을에 붉어진 것, 일 년 내내 붉은 것, 중국단풍과 당단풍처럼 이파리 모양이 다른 것도 있다. 그중 단연 두드러진 것은 앞마당에 우뚝 선 단풍나무다. 재보진 않았지만 대략 키와 폭이 3미터가량, 커다란 지붕을 이고 섰다.
게다가 유난히 새빨간 잎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잎들은 배경이 된다. 같은 나무라도 단풍이 드는 시기나 색깔이 다른데 햇빛과 기온, 수분과 토양, 나무의 건강 상태 때문이다. 그런데 단풍은 DNA도 남다르다. 유전자 변이가 커서 엽록소의 분해 속도나 색소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유전적 차이를 이용해 육종가들은 18세기 이래로 1,000개가 넘는 재배품종을 개발했다. 대부분 새빨간 잎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다. 그러니까 우리의 화려한 가을은 그리 길지 않은 세월에 사람의 힘이 더해져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단풍은 최적의 시점에 겨울을 대비한 결과다. 하지만 올해는 단풍잎이 물들기 전에 타들었다. 이상기후로 한계치 이상의 빛을 받아 물들기 전에 저물었다. 이제 짧은 가을과 늦은 단풍은 뉴 노멀(New Normal)이 될 것이다. 안타까운가? 단풍은 사람이 더 안쓰럽다.
단풍나무의 유전자 다양성은 전염병이 돌거나 극단적인 환경 변화에도 살아남을 확률을 높인다. 유연한 DNA를 가진 덕에 햇빛의 영향을 적게 받아 우거진 숲 속이나 덤불 속에서도 잘 자란다. 숲의 천이 과정에서도 후기수종에 속한다. 그러니 훌륭한 DNA를 가진 단풍나무는 오래 살아남아 인간의 종말을 지켜볼 것이다.
단풍 못지않게 낙엽도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떨어지는 가랑잎, 소복이 쌓인 갈잎, 밟히는 느낌, 바스락 뒹구는 소리, 타는 냄새와 불길에 사그라지는 소리까지. 이 모두를 다 갖춘 것이 단풍 낙엽이다. 단풍이 폭삭 내려앉은 어느 날에 별안간 마주친 붉은빛 카펫은 얼마나 황홀하던지.
황홀한 기쁨이 표독스러운 강풍에 모두 날아갔다. 11월의 끄트머리, 날씨는 또 한 번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수도권이 117년 만의 폭설로 고생할 때 이곳엔 폭풍이 몰아쳤다. 여러 날 동안 골짜기를 훑으며 근근이 붙었던 이파리들을 빨아올렸고, 밤마다 깊고 음울한 괴성으로 뭇 생명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혼돈스러운 환절기다.
잔해를 쓸어 모은다. 낙엽을 쓰는 것은 그저 생명을 다했기 때문이 아니다. 아스팔트가 너절해져서도 아니고 누군가 치워야 하는 쓰레기여서도 아니다. 단풍 낙엽은 투박하지 않아 나무 아래 식물의 숨통을 막지 않는다. 화단의 식물들이 추위를 견딜 수 있게 덮어 준다. 겨우내 마지막까지 쓸모를 다한다.
바싹 타들어 간 잎들은 모두 날아가고, 서로 부딪혀 입은 상처로 더 붉어진 아름다운 비극만 가지 끝에 남았다. 그래서 불의에 낙엽 진 나무 밑엔 쓸쓸함이 감돈다. 저절로 떨어졌으면 더 좋았으련만. 문득 모든 생의 결말은 별고 없이 찾아온다는 걸 깨닫는다.
사람도 마찬가지, 누구나 별고 없이 곱게 늙다가 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서리 맞은 잎새가 2월의 꽃보다 붉기로, 꽃이 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30대 같은 50대, 손녀딸과 미모를 겨루는 할머니, 청춘을 욕망하는 할아버지는 얼마나 끔찍한가? 인생의 기후 온난화다. 자연은 청춘을 연장하려는 인간의 허망한 감정을 질타한다.
빈틈없이 울던 풀벌레 소리는 온데간데없고, 한물간 화초는 누덕누덕 초췌해졌으며, 물이 얼고 겨울에 들어섰다. 사라지는 것이 있어 비로소 보이는 것도 있다. 시야를 가리던 잎 대신 가지 끝에 호수의 윤슬이 맺혔다. 밤하늘에 별이 많아지고 또렷해졌다. 시골에 머문 몇 년에 폐풍월(吠風月) 해본다.
<참고 문헌>
- 식물 대백과사전, DK『식물』편집위원회
- 숲교실교육자료, 산림청 산림교육자료실
<연재를 마치며>
어느덧 열두 달이 지났다. 은퇴 후 시골 생활을 소재로 글을 쓰다 보니 다시 겨울까지 왔다. 어떤 이들은 코끝이 찡해서 겨울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지내보니 나는 그냥 춥다. 활동량이 줄어드니 카로티노이드, 안토시아닌마저 소진되고 난방비만 쌓인다, 그래서 두어 달 따뜻한 곳에서 겨울을 보내기로 했다. 새로운 기회가 글로 잘 연결될지는 모르겠다.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