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인큐베이팅하다

Just Another Woman In Love, Anne Murray

by 잼스


꽃 그려 새 울려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 서정춘(1941- ) [봄, 파르티잔]


봄볕 같은 목소리라면 Carpenters의 Karen Carpenter와 Anne Murray가 아닐까? 요즘 Anne Murray의 <Just Another Woman In Love>을 들으며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한번 꽂히니 하루 내내 이 노래만 듣게 되네요. <You needed me>나 <I just fall in love again>처럼 늘어지지 않아서 좋습니다.


바야흐로 환절기입니다. 사람이나 계절이나 바뀌는 것에 대한 저항이 거세기는 매일반인가 봅니다. 경칩이 지나 따뜻한 햇살에 '이제 완연한 봄이군' 했다가 등허리 시린 추위에 놀라 진즉 청소해 둔 난로에 불을 지핍니다. 봄날씨는 기상청도 예보하기 어렵다고 할 만큼 변화무쌍합니다.


우선 밤낮의 기온차가 극심합니다. 이십도 이상 차이 나는 것은 다반사구요. 역시 춘분이 지나야 봄인가 봅니다. 올해는 봄가뭄이 심각합니다. 잔디는 메말라있고 화단 흙 위에 덮어둔 낙엽과 검불을 치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습기가 날아가지 않도록 말이죠. 전국 곳곳 산불 소식이 들려오고, 메마른 논밭 때문에 타들어가는 농업인들의 마음은 어떨까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에 비하면 날씨 때문에 갈팡질팡하는 내 모습은 사소하기 그지없습니다.


여전히 가지치기는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땀이 흘러 한 꺼풀씩 옷을 벗어던지다 보면 아침에서 한낮으로 시간이 가고 있음을 짐작하지요. 아직 초보 수준이라서 장미와 황매화는 말라죽은 것 위주로 쳐냈습니다. 며칠 전 감나무와 대추나무, 단풍의 높고 굵은 가지를 잘라내고 던져두었더랬습니다. 오늘은 그것들을 토막 내고 잔가지를 정리했습니다. 자르는 것보다 정리하는 일이 몇 배 더 수고롭습니다.


그래도 봄인지라 꼼지락꼼지락 이 계절에 해야 할 일을 합니다. 나무를 심기에 좋은 3월이니까요. 금목서를 창에서 가까운 넓은 화단에 옮겨 심었습니다. 좀 더 자라 많은 꽃을 피우면 향긋한 분냄새가 창문을 열고 들어오길 기대하면서요. 퍼플히더, 테디처럼 성장이 더딘 침엽수는 플랜트박스에서 큰 화분으로 독립시켰습니다. 겨우내 많이 상해서 가까이 두고 살뜰히 살펴보려 합니다. 등수국을 한그루 사서 울타리 밑에 심었습니다. 벽 타기에 능하고 추위에도 강한 품종이라니 마음은 벌써 울타리에 꽉 찬 수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온 것은 매화였습니다. 이제 한가득 피어 하얗게 뒷산을 가립니다. 곧이어 산수유가 앙증맞은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고, 동백꽃도 짙푸른 잎뒤에 빨갛게 숨어있습니다. 수선화와 할미꽃, 제비꽃이 먼저 피고, 꽃잔디도 엊그제부터 튀어 오르듯 피었네요. 튤립, 상사화, 목련, 동백, 작약, 꿩의비름 등도 새순을 드러낸 지 오래입니다. 작년에 알뿌리를 나눠 심은 수선화가 "ㅂㅂㅂㅂㅂ ㅗㅗㅗㅗㅗ ㅁㅁㅁㅁㅁ"하고 무리지어 솟아나며 노랗게 나팔불기 일보직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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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룸의 모종 퍼레이드, 앙증맞은 홑동백 - 토종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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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 걷고 새로 만든 화단, 울타리 밑에 심은 등수국


식물의 진화에서 씨앗은 획기적인 존재다. 씨앗은 딱딱한 껍질로 보호받으므로 건조에 견딜 수 있을 뿐 아니라 씨앗 속에 들어 있는 싹은 껍질의 보호를 받으며 발아시기를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있다. 식물은 물이 없으면 말라죽는데, 씨앗은 물이 없어도 긴 시간 기다릴 수 있다. 아주 오래된 씨앗에서 싹이 났다는 뉴스를 종종 보듯이 씨앗은 시간을 뛰어넘는 타임캡슐과 같다. 그리고 오랜 시간 유지된다는 것은 그동안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씨앗이라는 타임캡슐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다. 『전략가, 잡초』, 이나가키 히데이로


파종의 시기입니다. 올해는 일찌감치 모종 만들기에 힘을 쏟습니다. 꽃밭에 씨를 심기엔 아직 때가 일러서, 실내에서 싹을 틔우고 일정 기간 키웁니다. 아직 싹을 틔울 만큼 땅속 온도가 올라가지 않은 데다가 수분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야외조건이죠. 그러니까 외부와의 기온차가 10도가량 되는, 선룸은 인큐베이터입니다.


모종을 만드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선 실내라는 공간의 제약이 따릅니다. 화단을 채울 만큼 모종을 키우려면 내가 마당으로 쫓겨나야 할판이죠. 보통 한 종의 씨앗이 한 봉에 100 립에서 많게는 200~300 립씩 들어 있는데 심으려는 꽃만 30종이 넘는 데다가 채소 씨앗도 키워야 합니다. 모종트레이는 주로 50구짜리를 쓰는데 크기가 가로세로 54cm X 28cm이니 언감생심이죠.


농자재마트에서 구입한 원예용 상토나 배양토를 모종트레이에 가득 채우고 물을 흠뻑 줍니다. 압축분무기를 사용하면 흙탕물도 튀지 않고 이동하며 쓰기에 편리합니다. 흙에 나무젓가락으로 구멍을 내고 씨앗을 2~3개씩 넣어줍니다. 발아율이 보통 50~60%이기 때문에 넉넉히 심어주는 거죠. 능숙한 분들은 조금 큰 화분에 몰아 심어 싹이 나오면 일일이 모종판에 다시 옮기는 작업을 하기도 합니다. 아예 출아 후에 이식을 하는 것이죠.


씨앗이 큰 옥수수나 호박, 오이 등은 한 개씩만 넣어주고 씨앗크기의 1배 반 정도 깊이로 묻어줍니다. 자잘한 씨앗은 마른 흙을 살짝 덮은 후 물을 분무해 주면 적당히 자리를 잡습니다. 모종트레이에 담긴 상토의 양이 적어 흙이 쉽게 마르기 때문에 1~2일에 한 번은 물 주기를 해야 합니다.


물이 흥건한 모종판을 받쳐줄 것이 필요한데요. 스티로폼 뚜껑이 요긴하게 쓰입니다. 물받이뿐만 아니라 저면관수 용도로 쓰게 되죠. 며칠간 집을 비울 때, 모종판이 살짝 잠길 만큼 물을 담아주면 아래 구멍으로 빨아들인 수분을 흙이 머금고 있거든요. 모종의 기간엔 흙이 축축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싹이 나옵니다. 빼꼼하게 어깨를 드러낸 놈, 껍질을 머리에 이고 올라오는 녀석, 눈치 보듯 하얀 목덜미를 먼저 디미는 모습... 꼬무락꼬무락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싹에 유난스러운 반가움은 나만의 호들갑일까요? 사람이나 식물이나 어린 생명의 출현은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그 생명에 관여한 느낌입니다.


이러니 일이 자꾸 커집니다. 유홍초, 카네이션, 가우라, 댑싸리, 메리골드, 니겔라 모종이 선룸에 늘어섰습니다. 채소는 종류가 더 많습니다. 애호박과 단호박, 오이, 옥수수, 아삭이고추, 양배추, 브로콜리, 파프리카, 치커리, 잎들깨, 고수. 뿐만 아닙니다. 실외에 있는 플랜트박스에도 씨앗을 뿌려놓았는데 보온을 위해 밤마다 비닐을 쳐주는 작업을 반복합니다. '반직파(半直播)'라고나 할까요? 열무, 상추, 양상추 등 쌈채소와 버베나, 족두리꽃, 프릴드로즈, 백일홍, 달리아 등이 자라고 있습니다.


모종 만들기가 번거롭기는 하지만 까다롭거나 힘든 노동은 아니구요, 여러 가지 장점이 많습니다. 우선 어떤 것이 싹을 틔웠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밭에 직접 씨를 뿌리면 나중에 싹이 나와도 다른 풀들과 구분이 잘 안 되기 십상이죠. 조금 일찍 키운 만큼 꽃과 열매를 일찍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종이 어느 정도 자랄 때쯤 추가로 밭에 씨앗을 심으면 꽃을 보는 기간이 길어집니다. 경제적 이득도 있습니다. 모종을 구입하려면 비싼데 직접 키우면 거의 비용이 들지 않아요. 심고 솎아내는 수고도 덜 수 있습니다.


모종을 만들 때는 꼭 이름표를 잘 꽂아주어야 합니다. 기억은 기록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네요. 지난가을 뒷화단에 자운영, 수레국화 등을 뿌리고 표시를 해놓았는데 겨우내 유실되거나 이름이 지워져 버렸습니다. 한편 모종으로 만들기 어려운 것들도 많습니다. 너무 작아서 손가락으로 집을 수 조차 없는 것들, 용담과 금어초가 대표적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래에 섞어 뿌려주어야 합니다. 노지에 파종하더라도 구역과 식물이름이 잘 기록되어야 나중에 잘 알아볼 수 있습니다.


씨앗봉투는 이름이 훼손되지 않게 개봉합니다. 심은 자리에 꽂아두면 꽃의 생김새가 담긴 이름표가 됩니다. 심고 남으면 씨앗봉투를 스카치테이프로 밀봉해서 냉동보관 하면 됩니다. 일 년생 화초의 경우 씨받이를 해서 잘 보관하면 다년생꽃을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꽃들이 씨앗을 주변에 퍼뜨려 자연발아가 되기도 하고요. 보통 많은 정원생활자들이 노지월동 작물을 선호하는데 구근식물이나 다년생 화초도 손이 아예 안 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꼭 그런 작물만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오늘은 춘분. 예년보다 평균기온이 높은 것에 현혹되어 직접 화단에 씨앗을 뿌렸습니다. 버베나, 베르가못, 부용, 수레국화, 프릴드로즈, 과꽃, 금어초, 붉은꽃아마 등등. 잔디마당을 들어내고 원예용 상토를 깔아 새로 만든 화단에 말이죠. 화초마다 키높이를 신경 써가면서. 어느새 정원 디자이너가 되어 상상의 나래를 펼칩니다. 예술가가 따로 있나요? 컬러풀한 꽃으로 정원에 생명을 불어넣는, 내가 바로 정원예술갑니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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