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전원생활하기 딱 좋은 나인데...

by 잼스

잠시 교도소 문 앞으로 가보자. 정신건강의학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한 인터뷰에서 “은퇴를 한다는 건 장기수가 어느 날 출소해서 교도소 문을 나서는 모습과 같다”며 “정해진 규칙대로 살다가 자유가 주어졌을 때 막막한 심정이 바로 은퇴자의 심정”이라고 표현했다. 이 분이 감방생활을 해보고 이런 말을 한 것인지? 은퇴자의 한 사람으로서 비유가 적당치 않다고 생각하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잘 알겠다. 대체로 막막함, 공허함, 서운함과 같은 형용사로 은퇴의 심정을 나타내는 글이나 기사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졸업이나 제대처럼 분명 그 마음 어딘가에 홀가분함도 있을 것이다. 국어사전에는 “은퇴(隱退)”가 “직임(職任)에서 물러나거나 사회 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냄”이라고 나와있다. 여기서도 “손을 떼고 한가히”라는 말이 거슬리는 것은 녹록지 않은 현실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은퇴 초기에는 그동안 시간이 부족해서 할 수 없었던 취미생활이나 운동, 여행 등 여유로워 보이는 활동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주변 사람들의 연락이 뜸해질 때쯤 되면 “이제 어떻게 하지?” 하며 서서히 남아도는 시간이 부담스러워지게 된다. 이때부터 그 씁쓸한 막막함이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된다.


재충전의 시간은 금세 갑갑함으로 바뀌고 자주 방전되던 과거를 그리워하게 된다. 게다가 은퇴시기와 국민연금 지급 시기가 뚝 떨어져 있음을 자각하게 되고 심지어 그나마 위안이었던 국민연금도 조만간 기금 고갈이 예상된다고 하니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한다. 믿을 거라곤 부동산 하나인데 매매도 어려운 데다가 대출금리가 올라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소득도 중요하지만 자기의 역할이나 생활의 가치 즉 보람 있는 일자리가 많지 않다. 그러다가 아무 일이라도 찾는 상황이 되면 급여는 말할 것도 없고 퇴직 전과 비교해 질적으로 떨어지는 직업을 택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편의점, 배달, 택배, 공사 노무직 등에 50대 이상의 퇴직자들이 대거 유입되고 있다고 한다. 또 경제활동을 하는 노인들의 79.3%는 생활비를 보충하기 위해 일하고 있다. 살아있는 동안 쓰러지기 전까지 원하지 않는 일만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편 새로운 일과 관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충전만 계속하고 있는 은퇴자도 있다. 은퇴 후 긴장감이 풀린 탓도 있지만 몇 번의 재취업 시도가 현실의 벽에 부딪치다 보면 결국 자신감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게 된다. 이 같은 경제활동의 단절은 대부분 좁은 아파트 공간에서 생활하는 가족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풀꽃 1. 나태주>


은퇴자의 경우는 상황이 사뭇 다르다. 오래 보면 지겹다. 마찰이 생긴다. 아마도 부부싸움이 가장 빈번한 시기가 결혼 후와 은퇴 후가 아닐까? 각기 다른 생활을 하던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자세히 보고 오래 보다 보니 안보이던 단점이 크게 부각된다.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해도 피할 곳이 없다. 이렇게 생겨난 불화가 쌓여 황혼이혼이 증가하고 있다.


고독사를 하게 되는 데까지 3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첫 번째가 실직이고, 두 번째가 이혼, 세 번째 질병을 거쳐 고독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은퇴자들은 직장생활에 매여 또는 직장을 핑계로 가정에 등한시할 수밖에 없는(또는 등한시한) 생활을 해왔다. 이 때문에 가족들은 그들을 돈 버는 사람으로만 인식해왔고 이제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니 쓸모가 다한 것이다. 그렇게 실직은 이혼의 원인이 되고 남자의 고독사가 여자의 두 배가 되는 것도 이런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은퇴 이후 닥치는 문제들은 일과 공간에 대한 부조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가장 일반적인 해결 방법은 재취업을 통해 은퇴 전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급여가 조금 적더라도 일하는 시간이나 양이 줄어들면 한결 좋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정말 "손을 떼고 한가히" 지내야만 하는 시간이 온다.


이제부터는 일자리를 찾을 것이 아니라 일거리를 찾아야 한다. 은퇴 후 전원생활을 꿈꾸는 남자들이 많은데 그들의 아내 대부분은 '너나 가세요'한다. 현재 살고 있는 집, 도시를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당장의 지출과 나중에 자금 회수 문제, 도시에서 쌓아온 관계 단절에 대한 두려움, 편의 시설 부족에 따른 불편한 생활 등 여러 가지 얘기가 오고 갈 것이다.


앞으로 수십 년 남은 평생의 일거리를 위한 시작이라 보면 그러한 문제들은 작아 보인다. 시골생활을 하는 것은 낭비가 아니다. 퇴직 후 취미생활에 드는 비용으로 치더라도 큰 금액은 아닌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정원 가꾸기나 텃밭 가꾸기는 평생 할 수 있는 생산적 활동이다. 꽃을 싫어하는 아내라면 모르겠지만 도시와 농촌을 오고 가니 관계가 아예 단절될 일도 없고, 편의시설은 밤문화 빼고 다 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막연하게 전원생활을 꿈꾸기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생활을 할 것인지 그려볼 필요가 있다.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지 자신의 취향도 확인해 보고.


공간의 확장 또는 가족 간의 시간차 공간 점유 등 공간의 변화도 삶의 질을 바꾸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너무 늦지 않게 자연 속 너른 공간으로 가 보길 권한다. 전적으로 귀농을 하는 것과 달리 5도 2촌의 시골생활은 훌륭한 대안이 많다. 저렴한 시골 주택을 골라 매입하거나 임대하여 주말 부부 또는 주중의 전원생활을 하는 것은 어떤가? 은퇴자는 거주하고 배우자가 여유시간에 방문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전원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2010년 이후 이른바 베이비 부머 세대들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해마다 30만 명에서 40만 명의 직장인들이 앞으로 남은 20~30년의 출발선에 선다. 서울시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평균 퇴직 연령이 남자 기준 53세이니 훨씬 더 많은 인구가 같은 불안감을 공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몇몇 학자들은 베이비 부머의 은퇴, 에코 부머의 취업 불안이 지속되면서 사회적 우울과 정치적 냉소가 늘고 행복감은 상대적으로 훨씬 낮아진 데이터를 보게 된다고 한다.


은퇴는 인생의 마침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퇴직하는 것을 인생에서 은퇴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제는 그 개념이 바뀌었다. 역할의 변동 때문에 생활이 어수선해진 것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베이비 부머들이 역사상 가장 많은 자산을 가지고 퇴직하는 세대라고 한다. 비록 그것이 부동산에 집중되어 있다 할지라도 여력이 있다는 증거다. 그런 면에서 은퇴라는 상황은 전원생활하기에 좋은 명분이고 적절한 타이밍이다. 어쩌면 다시없을 기회일 수 있다.


이제 자세히 보니 예쁘다 / 오래 보아도 사랑스럽다 / 너도 나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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