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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스 May 20. 2023

어쩌다, 노래

새벽, 김민기 노래극 개똥이 중에서 외 19곡

먼지 같은 소음 속, 또렷이 들려오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음악에 잊었던 추억이라도 떠오르면 찌릿한 전율이 돋지요. 블러 처리된 사진처럼 음악이 마법을 거는 순간, 그 가느란 한 소절이 모든 소음을 덮고 어떤 기억으로 벅차오릅니다. 그 멜로디는 저편 어느 날의 향기도 가져옵니다. 기억하고자 해서 떠오르는 것이 아니고 묻어나는 것이죠.   


몸이 행동을 기억하는 것처럼 누구나 뇌주름 곳곳에 박힌 노래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경쾌하게 또 어떤 것은 무겁게 각인되지요. 부드러운 리듬이 오히려 더욱 날카롭게 꽂히기도 합니다. 미소와 눈물이 함께 섞여 구분이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정해지진 않았지만 알맞은 시간이 흘러 세월이 덧칠되면 비로소 인생이 됩니다. 그리움으로.


하루종일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의자에 올라앉아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으며 시작한 음악 듣기가 밤늦은 시간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요? 눈 또는 비가 오거나, 햇살이 너무 좋거나 아니면 너무 따갑거나, 바람이 몹시 불거나 반대로 나른할 만큼 산들거리거나. 그러니까 일하기 싫은 날 말이죠.




제가 요즘 좋아 듣는 우리 노래 스무 곡을 먼저 소개하고자 합니다. 선입견 없이 노래를 먼저 들어보길 바라는 마음에서예요. 어쩌다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 몰랐던 노래를 알게 되면 곡에 대한 정보나 말이 방해가 될 때가 있어요. 노래의 분위기나 멜로디, 노랫말이 주는 감동은 듣는 사람의 것이기 때문에 그런 느낌에 내 글이 거슬리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 새벽, 김민기 노래극 개똥이 중에서

· 여름의 끝자락, 김동률

· 산책, 백예린

· 화조도, 심규선

· 인사, 범진

· 혼자 남은 밤, 김광석

· 회상, 박은옥

· 시모네타, 줄리아하트

·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를, 해바라기

· 잊지 말기로 해, 성시경 권진아

· 민들레, 우효

· Never let go, 김푸름

· 마음, 오정선

· 마술사, 부활

· 비가 내리는 날에는, 윤하

· 외길, 김정호

· 안녕, 폴킴

· 잘 지내자 우리, 짙은

· 칵테일 사랑, 마로니에

· 청춘의 꿈, 심성락 연주


러닝타임이 한 시간 반가량 되네요. 기왕에 쓴 글 속에 들어 있는 노래는 제외했습니다. 제 개인적 취향이고 그에 따른 느낌이니 흘려 읽기를 권장합니다. 좋아하는 노래라고 열거했지만 정작 노래를 부른 가수들에 대해선 아는 것이 거의 없어요. 심지어 절반 이상은 얼굴조차 모르는 아티스트들이고요. 노래 자체가 좋을 뿐 음악가의 인생은 제 관심 밖입니다.


<새벽>은 '김민기 노래극 개똥이'에 나오는 곡이에요. 늦잠을 자버린 말똥구리 할아버지가 밥 해 먹고 세수할 물을 풀잎아주머니에게 사정하자 너그러운 아주머니가 맑고 시원하고 큼직한 이슬을 허락한다는 이야기. <아침이슬>이 이렇게 연결되네요. 아쉽게도 뮤지컬을 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본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노랫말이 선명해서 눈앞에 선하게 펼쳐지기 때문이죠. 어린아이들에게 들려주기에도 좋은 노래입니다.


요즘처럼 무더운 한낮에 어울리는 '김동률'의 <여름의 끝자락>입니다. '느릿느릿 읽던 책을 베고서' 잠든 이의 남가일몽 장면들이 스크린에 영사하듯 흘러가지요. 대체로 '김동률'의 음악은 클래시컬한 느낌을 주는 노래가 많은 것 같아요. 뙤약볕 아래 일하다가 잠깐 쉴 때 이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백예린'의 <산책>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보고픔이 수채화처럼 아련하게 펼쳐지는 노래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정리가 된 그리움이랄까요? 경쾌한 멜로디를 쫒다 보면 푸른 숲길을 걸으며 '아름다웠던 그때가 있었지'하고 살며시 웃으며 회상하는 듯한 인상을 받아요. '내가 콕 들어앉아 있던 그 눈동자'라는 가사가 특히 마음을 끕니다.


<화조도>는 보통 꽃과 두 마리 새를 그린 그림으로 부부애, 연인 사이의 사랑을 뜻한다는데 '심규선'의 그것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역설일까요? '어찌 잊으라 하십니까. 그 빛나던 한 때를...' 가야금 소리 따라 가물가물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를 듣다 보면, 등불 아른거리는 격자 창문에 한 여인의 처연한 사랑이 비치는 것만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도 사랑을 몰라'라는 끝소절에선 서린 한마저 느끼게 되고요.


왠지 저녁노을과 어울리는 '범진'의 <인사>입니다. 빈티지 가구를 연상케 하는 목소리로 '안녕 멀어지는 나의 하루야, 빛나지 못한 나의 별들아' 할 때 갑자기 울컥했습니다. 가족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삶을 뒤로하고 살아간 이 세상의 '아버지'들의 모습을 담아 만든 노래라고 하니 노래에 담긴 메시지가 그대로 마음에 전달된 때문이겠죠.


이슥한 밤엔 역시 '김광석'. 그의 노래는 능란하지 않습니다. 세련되지 않아요. <혼자 남은 밤>만 해도 고음으로 올라가는 부분이 어딘지 매끄럽지 못해 어색하고요. 하지만 아주 미세해서 그것이 긴장감을 갖고 주의 깊게 듣도록 하는 것 같아요. 혼자 남은 쓸쓸함을 노래하기보다는 '내가 곁에 있어'하며 불러주는 듯한 느낌이 드는 노래입니다.


 <회상>은 시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아요.


나 차라리 저 파도에 부딪히는

바위라도 되었어야 했을걸

- 중략 -

저 편에 달이 뜨고 물결도 잠들면은

내 가슴 설운 사랑 고요히 잠이 들까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그대 내 생각 잊었나'에서 '그대'하고 툭 떨어지는 '박은옥'의 한숨 섞인 음정에 내 가슴도 툭 내려앉는 느낌을 받아요. 


<시모네타>는 보티첼리의 그림 《비너스의 탄생》에서 볼 수 있습니다. '줄리아하트'가 좋아하는 그녀가 절세미인인 모양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우물쭈물, 용기를 내지 못하는 걸까요? 애타는 심정이야 어떻든 개인적으로 저는 이 같은 언어유희가 즐겁습니다.


얼마나 너를 좋아하는지 내가 좋아하고 있는지

너는 몰랐으면 좋겠어 너는 절대 모르길 바래

아니 알게 됐음 좋겠어 아니 몰랐으면 좋겠어

아니 알아 줬음 좋겠어 아니 역시 모르길 바래


'해바라기'라기보다 '한영애'의 노래라 하는 것이 더 적절한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를>. 간직해 놓고 말은 한마디도 못 한 것은 아마도 <시모네타>와 비슷한 이유겠죠? 이 시절 한영애의 목소리는 '아무도 모르는 우리의 추억'과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좋습니다. <봄날은 간다>나 <여울목>에서 들었던 연륜의 목소리도 좋지만. 


'성시경'과 '권진아' 버전의 <잊지 말기로 해>는 처음엔 듣기 불편했던 곡입니다. 어울리지 않는 음들이 어색하게 섞인 느낌이랄까? 왜 이렇게 어렵게 만들었을까 했는데 <그대 안의 블루>, 김현철 작곡이더군요. 이 분 특유의 멜로디가 있어요. 듣다 보니 귀에 익어 초반의 똑똑똑 통통통 피아노 소리에 바로 감정이 잡힙니다.


'우효'가 부른 <민들레>는 기교를 부리지 않고 무심하게 부르는 창법이 나른한 멜로디와 잘 어울리는 곡입니다. 하지만 노래 제목과 매칭이 잘 되질 않아요. '우리 손잡을까요'나 '우리 동네에 가요'같은 가사만 귀에 맴돌 뿐, 이 노래는 가사보다 독특한 리듬과 멜로디 그 자체로 자주 듣게 되는 노래입니다.


드라마 ost로 매회 엔딩을 장식한 '김푸름'의 <Never let go>는 TV를 보다가 알게 된 노래인데, 도입부 멜로디가 강하게 심장을 움켜쥐는 바람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대중음악이 많이 발전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중독적인 예술성에 대한 감탄에 더해서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노래입니다.


'오정선'의 <마음>은 꽤 오래전에 나온 노래입니다. 찾아보니 1978년 발매되었고, 원곡은 미국의 록밴드 The Beau Brummels의 《Just a Little》이네요. 단순한 록 스타일의 곡을 몽환적이고 사이키델릭 하게 편곡해서 강한 흡인력을 가진 독특한 색깔의 노래로 다듬었어요. 특히 '나는 어여쁜 소년의 손에 의해 사랑 가득한 세계로 날아가리'와 같은 노랫말은 꿈결처럼 강한 여운을 남깁니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현란하게 고음을 갖고 노는 박완규. 기차처럼 묵직하게 돌진하는 김태원의 기타 연주.  '부활'의 <마술사>는 심장의 박동수를 마구 올려놓는 노래입니다. 끝난 뒤에도 계속 '거울아'라는 외침이 귀에 맴도는, 시원한 곡이죠.


고음으로 따지면 <비가 내리는 날에는>도 못지않죠. 정말 비가 퍼붓듯 내리던 날 카페에서 처음 듣게 된 노래. 슬픔은 엉엉 울거나 터질 듯 소리쳐야 후련하게 매듭져지는 것일까요? 마음으로 삭이면 언제든 다시 고개를 쳐들 테니 '윤하'의 노래가 도움이 될 것도 같습니다.


폐병으로 요절한 가수임을 알고 있어서일까요? '김정호'의 <외길>을 들으면 경계인의 쓸쓸함과 고독이 느껴집니다. 한 소절 한 소절 사무치게 부르는 목소리에서, 다가오는 자신의 마지막을 지그시 바라보는 상상을 합니다. '철새들 머무는 높다란 언덕 위에, 비바람 맞으며 홀로 서 있어, 내 인생 외로움을 말해 주려마.'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런 글귀에 숙연해집니다.


'폴킴'의 <안녕>과 '짙은'의  <잘 지내자 우리>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 소절이 하이라이트죠. '안녕이라는 말을 해...'로 끝장을 내죠. '마음을 다 보여줬던 너와는 다르게...' 농도 짙은 음색의 바순을 연상시키는 '짙은'의 첫 음성도 마찬가집니다. 또 다른 공통점은 둘 다 제가 노래방에서 즐겨 부르는 애창곡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안녕>과 달리 <잘 지내자 우리>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르지 않아요. 듣는 사람들이 딴청 하거나 다음 노래를 찾느라 부산스러워집니다. 그러니까 잘 부르지 못하면 따분해지는 '짙은' 매력이 있어요.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은 인생곡입니다. '아침 햇살 눈부심에 깨우지도, 프리지어 꽃향기를 안겨주'지도 못했지만 결혼을 선물해 준 음악이죠. 아내와의 연애시절이 담긴 곡이라서 필수템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 오십 페이지 세쨋 줄'에 버금갈 만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이십일 번'을 노래하게 했던, 프리지어 노란 색깔 분위기의 이 곡은 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줍니다.


끝으로 '故심성락'님의 아코디언 연주곡 <청춘의 꿈>입니다. 영화 <비열한 거리>의 ost로 원곡을 찾을 수 없어 우리 노래려니 하고 듣고 있어요.  <인어공주> ost도 마찬가지지만 영화를 보지 않고 아코디언 연주와 멜로디에 빠진 케이스죠.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긴 연주의 원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을 때마다 하게 됩니다. 더 이상 이 분의 아코디언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스무 곡을 소개하느라 길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리 말씀드렸죠? 흘려 읽기를 권장한다고... ^^;  제 경우엔 음악이 인생입니다. 세상의 모든 순간에 음악이 있습니다. 음악가는 아니지만 삶의 대부분의 장면을 노래와 연결해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라디오를 들으며 자라왔고,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음악을 가까이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음악을 들려주는 일을 해본 적도 있었고, 군복무 시절에도 방송과 관련된 정훈 보직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때 알게 된 여러 즐거움 중 하나는 내가 선곡한 음악이 사람들의 일상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겁니다. "와, 이 곡 좋네요. " 같은 반응을 보여주었을 때 얼마나 신이 나던지.


인간은 음악을 만들고 교환합니다. 표현하고 소통하기 위해서 음악을 사용하죠.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퇴직 당시 직원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노래 100곡을 USB에 담아 선물했습니다. 뭔가 오래도록 남아 도움이 될만한 것을 전하고 싶어서. 한데 괜한 짓을 한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은 버튼만 누르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솔직히 누가 남이 선곡한 음악을 귀 기울여 듣겠습니까?


음악은 듣지만 들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TV와 미디어에서 들려오는 노래나 리듬이 껄끄러울 때가 있어요. 목적을 가진 음악이 난무하기 때문이죠. 원치 않는 소리의 공격. 게다가 우리의 일상은 피곤한 일의 연속이고 몸은 따라주지 않으니 그냥 조용히 쉬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야말로 어느 때보다 음악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사색하고, 성찰하며, 삶의 리듬을 찾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 면에서 각자의 인생 스코어,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배경음악을 만들어 서로 나누는 것은 아름다운 의미가 될 것 같습니다. 지금 음악을 만들고, 노래하고, 글을 쓰고 있다면 아마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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