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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스 Dec 15. 2022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

부피에, 고흐, 발자크가 나에게

지인 부친의 부음을 받고 문상을 위해 고향엘 갔다. 인천을 떠난 지 대략 2주 만이다. 이미 상가에 와있던 지인들과 인사를 하고 나니 예전의 침묵 불안증세가 도졌다. 아직 도시의 때를 벗지 못한 것이다. 대화가 끊기는 것이 어색한 틈을 비집고 누군가 나의 시골생활 얘기를 물어왔다. 이런 대화가 오랜만 이어서일까? 너무 많은 말을 했다. 어느덧 전원생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자꾸 목소리가 커지는 나. 내 얘기를 하느라 명복을 제대로 빌기나 한 건지 고인께 죄송스럽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꼭 물어보는 이야기. "몇 평이에요?" 도시병이다. 내가 오백 평이라고 하면 "오~" 하면서 관심도가 급격히 높아진다. 도시에서 그만한 규모의 집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도시의 국민주택 규모가 500평이라면 그처럼 긴 감탄사는 튀어나오지 않을 것이다. 정작 시골집은 마당이 있기 때문에 가구수가 많은 마을이 아니면 삼백 평이 넘는 집은 흔하다.


거기서부터인 것 같다. 지인들의 관심을 업고, 사실을 말하는 것에서 벗어나 권유와 경험이 섞이면서 힘 빼고 얘기하기 어려워진 것이. 선배랍시고 이렇게 저렇게 훈수를 두는가 하면 조금 안다고 내 방식을 강조하며 한편으로 내 생활방식에 대한 주변의 인정을 구하고 있었다. 사람마다 자신들의 여건이 있고 그에 맞춰 생활방식을 결정하는 것인데 내가 마치 맨 앞에 선 것처럼 열심히 떠들고 있는 모습이란... 


현재의 내 생활에 자신감이 없거나 "이 정도하고 있어"라는 우쭐함, 그 사이 어중간한 지점에 내가 있었다. 도시를 떠나와 살면서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이유는 뭘까? 잠자고 밥 먹는 시간도 아까울 만큼 내가 정말 좋아서 하는 것이면 됐지, 그것이 그렇게 인정받아야 할 일인가. 도시병은 남 얘기가 아니었다.


<나무를 심은 사람(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을 다시 읽고 보았다. 1987년 <Frédéric Back> 감독의 애니메이션 <나무를 심은 사람>은 1953년 <Jean Giono>가 쓴 <희망을 심고 행복을 가꾼 사람>을 원작으로 한다. 엘제아르 부피에(Elzéard Bouffier). 부피에 외엔 등장인물 중 어느 누구도 나무를 심지 않는다. 심지어 그간의 사정을 알고 있는 '나'조차 숲에 감탄할 뿐이다. 


생계와 질병 때문에 고통 속에 살면서도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은 반 고흐의 삶은 처절하다 못해 비참하다. 생전에 반 고흐는 자신의 그림을 거의 팔지 못해 "언젠가는 내 그림들이 물감 값 이상을 받는 날이 올 것이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스스로 자신이 그린 그림의 가치를 물감 값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문학가인 오스카 와일드나 그의 평전을 쓴 츠바이크는 그렇다 치고 마르크스나 엥겔스까지 추앙해 마지않았던 발자크. 인쇄소에서 조판이 완료되고 난 뒤에도 끊임없이 가필을 했고 심지어 소설이 출판되고 난 뒤에도 내용을 수정, 보정하기 일쑤였던 그는 도박과 사업으로 인한 빚을 갚기 위해 글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후세의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들의 굴하지 않는 의지를 칭송한다. 인생의 끝까지 자신들의 작업을 해나갔다는 것에 존경심을 표한다. 요즘 월드컵 신조어에 <중꺾마>라는 것이 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란다. 그것이 그들의 삶과 작품에 녹아들어 있다는 것이다. 진심일까? 결과를 아니까 그렇게 살아보라고 하면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람들의 칭송이라는 것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사는 동안 "내가 보기에 좋으니까 하는 것", "내가 보기에 좋을 때까지 하는 것"을 했다는 것이 삶의 의미가 되지 않았을까? 씨앗을 심어 자라고, 맘에 드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가는 동안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 좋았던 것이 그들 삶의 기억의 전부라면 너무 가혹한가? 


숲을 이루고 물이 흘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정신병원에서조차 끊임없이 명화를 그리고, 출판된 후에도 수정과 가필을 해가면서 명작을 썼다는 후세의 예찬을 부피에나 고흐, 발자크는 알리가 없다.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영향을 끼쳤을지는 몰라도 그들의 인생 속에는 평가의 높낮이가 없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이것이다.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은 안간힘, 잘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 늘 평가받으면서 인정받기를 원했던 그 시절을 치워버리라고.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던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정원이라는 커다란 캔버스에 네가 보기에 좋은 그림을 그리고 네가 보기 좋을 때까지 씨앗을 심자고. 계절마다 해마다 끊임없이 가필을 해가며 즐거운 장편소설을 쓰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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