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잼스 May 28. 2023

오늘은, 비

Rain Golf, Brockbeats

마당은 종일 젖어있습니다. 조금씩 잦아들어 한 방울 한 방울 다 셀 수 있을 것 같던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지더니 보리밭을 훑고 지나는 센 바람처럼 일시에 쏴아하고 몰아칩니다. 먼 산을 하얗게 막아선 구름은 움직임이 둔하고, 아무래도 하루종일 더 많은 비가 내릴 것 같습니다. 한편으론 쉼과 여유를 가져다주는 비죠.


빗소리는 바닥을 닮아 있어요. 사실 비가 내리는 소리는 잔디와 나무데크, 돌바닥에 부딪치는 소리에 묻혀있습니다. 나뭇잎 위를 스스스 스치며 내리는 소리, 타닥타닥 마른 장작 태우는 처마 밑 낙숫물 소리는 마음을 움찔거리게 하죠. 빗줄기가 굵어지자 카보네이트 차양 위에선 드럼 연주가 클라이맥스로 치닫습니다. 스네어드럼을 두드리는 스틱의 바운싱은 강하고 빠른 리듬으로 듣는 이를 무아지경에 빠지게 합니다. 기어코 처마 물받이에서 차고 넘친 빗물의 박수소리를 이끌어냅니다.


커다란 작약 꽃잎이 바닥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궂은 날씨에도 한낮에 꽃봉오리를 열어젖힌 때문이에요. 비 그치면 새로운 꽃봉오리가 올라오겠지만 작약의 계절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개양귀비와 수레국화는 세찬 빗방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져있어요. 가녀린 몸매를 탓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일으켜 세워주겠지만 다음 생엔 다이어트에 너무 신경 쓰지 길 바래.



손길 닿지 않는 곳에 내리는 비는 고마운 선물입니다. 감나무, 밤나무에 물조리개나 물호스가 어디 가당키나 합니까? 잔디마당도 스프링클러로 온전히 감당이 안됩니다. 전체를 골고루 적셔줄 수 있는 것은 역시 비 밖에 없어요. 물을 좋아하는 오이와 애호박, 양배추는 한 뼘씩 눈에 띄게 자라 있고, 키재기 하던 당근 이파리도 체격이 커져 풀로 뒤덮인 밭에서도 금방 눈에 띕니다. 굵어진 열매를 이고 있던 매실가지가 빗물에 축 쳐져 땅에서 가까워져 있고, 굵은 단풍 밑동도 오랜만에 온몸에 물을 끼얹습니다.


아치에 매달린 빨간 장미가 오랜 빗줄기에 색이 바랜 느낌이 듭니다. 빗물에 젖어 진해진 바위 색깔과 대비가 된 때문일까요? 창문에 맺힌 물방울이 도르르 흘러내립니다. 창밖에 널따란 브로콜리 잎사귀에도 동글동글 웅크려진 빗방울이 반짝이고 있네요. 빗물 재활용을 위해 내놓은 플라스틱 물받이에 한가득 빗물이 찼습니다. 툭툭 튀는 빗방울을 동그란 파장으로 밀쳐내고 있어요. 소소하지만 비 오는 날에 꼭 눈에 담아두고 싶은 풍경입니다.



이런, 선룸에 빗물이 떨어지고 있어요. 전부터 비가 험하게 올 때마다 새고 있었지만 올라가기 위험해서 실리콘 방수를 미뤄왔던 곳이에요. 얼른 빈 그릇을 받쳐 빗물을 받아냅니다. 어릴 적 비 새던 천장이 떠오릅니다. 지금이야 빗물 똑똑 떨어지던 양은그릇이 오래된 추억 속 장면이지만, 그 얼룩진 천정 벽지의 기억은 마치 푹 젖은 운동화를 신은 것처럼 유쾌하진 않습니다. 빨리 수리해야겠습니다.


뜰로 나가보니 곳곳에 물웅덩이가 만들어져 있네요. 뾰족한 바비큐 꼬치로 찔러 꽃밭에 고인 물을 빼주고, 낙엽이 흘러들어 가지 않도록 마당의 배수로를 살짝 열어 길을 터줍니다. 재스민 화분을 차양 밑 데크로 들여놓고, 모종판도 강한 빗줄기에 파이지 않도록 피난시킵니다. 수경화분 속 물양귀비와 어리연은 반쯤 물에 잠겼지만 빗물로 물갈이를 하기 위해 모른 채 뒤돌아 섭니다.


얼마 전 물까치가 선룸 앞 주목 속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았어요. 물까치는 가족사랑이 유별나서 멀리서도 대화하듯 서로 소리를 주고받으며 무리 지어 활동합니다. 농작물에 피해를 주기 때문에 유해조수로 지정되기도 했죠. 새끼에 대한 사랑이 지독해서 둥지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사람도 공격합니다. 이 빗속에도 엄마 찾는 새끼를 위해 비에 흠뻑 젖은 채 둥지를 들락거리며 보살핍니다. 당분간 접근금지! 피곤한 사랑입니다.  



비 오는 날엔 축축한 음악이 제격입니다. Brockbeats의 'Rain Golf'는 그런 류의 음악입니다. Low-Fidelity음악이라고 하나요? 일부러 저음질 음원이 연상되도록 라디오 주파수 노이즈를 삽입한 음악입니다. 듣고 있노라면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가는 느낌,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의 아련한 타임슬립이 일어나는 노래입니다. 


I make a date for golf

내가 골프 약속을 잡으면

And you can bet your life it rains

영락없이 비가 오고

I try to give a party

내가 파티를 열려고 하면

And the guy upstairs complains

위층에서 뭐라고 해


처량하고 왠지 처지는 느낌의 이 노래 원곡은 Chet Baker의 'Everything happens to me'인데요. 1954년에 발매해 70년 동안 흐느적거리는 창법과 중성적인 음색으로 사랑받고 있는 'Sings : It Could Happen To You' 앨범은 쿨재즈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명반으로 꼽힙니다. 'My Funny Valentine'과 'I Fall in Love Too Easily'로 그 안에 있죠.


이런 날엔 파전에 막걸리. 공식이지만 오늘은 건너뜁니다. 내일 아들이 오기로 해서 버스터미널까지 마중을 나가야 해서요. 살짝 반 통만 할까요? 변명 같지만 어둠이 찾아오고 온통 빗소리가 주위를 채우니 숙제를 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공식을 풀어야 하루가 마무리되는 거겠죠? 그럼 조금 목만 축이는 걸로.


매거진의 이전글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