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잼스 Jul 04. 2023

장마, 감자전

<In All Honesty, I Do> Nocturnal Spirits

감자를 씨알 굵은 놈으로 고른다. 물에 씻은 후 칼로 껍질을 발라낸다. 채칼로 벗기면 두껍게 깎여 손실이 크고, 씨눈이 박힌 움푹한 곳을 정리도 해야 해서 과도가 편하다. 봄에 심을 땐 싹을 틔울 생각에 씨눈을 찾았지만 이제 먹을 땐 파내느라 이리저리 뒤적거리니, 참 사람 이기적이다. 어쨌든 얇게 깎느라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으니 잡념을 떨치기에 이만한 것이 없다.


스스스... 창밖에 빗줄기가 나뭇잎을 세차게 두드리니 마음이 번잡하다. 뒤켠 계곡을 감아 내려가는 굵은 물소리 위에 얹혀 음산한 느낌도 든다. 하루 이틀 걸러 비가 내리고 몸이 끈적일 만큼 습한 것이 그야말로 장마다. 후텁지근 하지만 이상기후가 이상하지 않은 요즘엔 오히려 계절에 맞는 날씨가 반갑기도 하다. 한낮이지만 검은 구름이 밀려오며 채도가 낮아진다. 풀빛이 짙어진다.


감자는 얇게 썰어 채를 친다. 얇게 자르려 할수록 입술에 힘이 들어간다. 칼 끝에 또각또각 잘리는 느낌이 선뜻하지만 명쾌하다. 칼질하는 느낌이라니, 익숙해지기 쉽지 않다. 채 썬 감자는 찬물에 담가 전분을 뺀다. 전분이 많으면 서로 엉겨 붙어 바삭한 맛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애호박도 동그랗게 잘라 가늘게 채를 쳐 놓는다. 


갑자기 빗발이 굵어지니 살짝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 마당으로 나가본다. 와르르 차양 빗물받이 위로 넘쳐 쏟아지는 낙숫물 소리가 요란하다. 배수구를 확인하고 뒤를 돌아보니 와우! 물양귀비 틈바구니에 보랏빛의 여리여리하고 투명한 부레옥잠꽃이 피었다. 첫 만남, 나와 보길 잘했다. 이런, 플록스도 이 빗속에 꽃을 피웠네. 자연의 시계는 어떤 날씨에도 호들갑이 없구나.


두부 반모를 으깨어 물기를 짠 다음 썰어둔 감자채, 애호박과 함께 버무린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부침가루를 적당히 뿌려준다. 늘 이 '적당히'라는 것이 어렵긴 하다. 이제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른 후 버무린 재료를 얇게 펴 바른다. 얇을수록 바삭하고 맛있다는 유튜버의 전언이다. 계란을 풀어 얹어주고 불을 약간 줄여 노릇하게 구워지길 기다린다. 


세찬 빗줄기 속에 백합과 원추리는 너무 활짝 꽃잎을 열었다. 빗물이 들어찰까 괜한 걱정을 한다. 접시꽃, 독말풀, 아프리칸 메리골드, 백일홍과 달리아도 그 큰 꽃송이를 달고 꿋꿋하다. 이 정도 빗줄기야 별일 아니라는 듯. 알알이 맺힌 포도송이와 연노랑의 오크라는 널따란 잎 뒤로 숨었다. 키 작은 프렌치 메리골드, 천일홍, 캄파눌라는 잘 버티고 있지만 세이지, 가우라(바늘꽃), 버베나는 힘겨워 보인다. 사실은 모두 '그래 보인다'.



뒤집개로 밑을 들쳐보아 노릇해졌으면 접시를 덮고 전을 뒤집어 반대편을 굽는다. 그리고 다시 한 장 더. 이번엔 뒤집은 전 위에 치즈를 뿌리고 만들어둔 전을 덮어준다. 이른바 치즈감자채전 (feat. 두부, 애호박). 애매한 '적당히' 때문에 간이 안 맞으면 마요네즈와 간장, 청양고추를 섞어 소스를 만들어 찍어 먹으면 되겠다. 


내친김에 곁들일 음료도 만들어 본다. 채소주스. 텃밭에서 수확한 당근, 양배추, 오크라 그리고 오이에 외부에서 조달한 사과와 바나나를 넣고 믹서기를 돌린다. 참, 적당히 물 넣는 것을 잊지 말아야지.  


인적도 없고 새소리도 사라졌다. 어둠과 함께 빗줄기가 굵어지며 시야가 뿌예지고 강한 비바람이 창으로 들이친다. 살짝 두려움이 인다. '이 안에 있어 다행이야'. 이런 안도는 이기적인 것일까?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Nocturnal Spirits의 <In all honesty, I do>가 빗소리에 가물가물하다. 생각이 많아지면 웃음이 사라진다. 비틀린 언어로 행복하기를 어렵게 만드는 글을 너무 많이 읽은 탓이다.


감자전을 한 조각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그동안 나의 식사를 위해 이처럼 많은 시간과 정성을 기울였을 고마움에. 가만히 앉아 차려진 밥상을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호사였는지. 장마 속 햇볕 좋은 날 부리나케 이불과 빨래를 널고, 비 새는 곳을 메우고, 오일을 바르며 그렇게 혼자 하는 일이 많아지니 알게 된 현실과 여기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가 무심히 지나쳤을 많은 사람들의 도움들. 모두의 덕분이다.



치즈감자채전을 만들 때 유의사항! 반드시 양 조절을 잘해야 한다. 실패할 경우 나처럼 하루종일 이것만 먹을 수 있음.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은, 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