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잼스 Apr 26. 2023

술 데우는 밤

The Other Side Of The sun, Janis Ian

비 오고 밤 기온이 뚝 떨어졌다. 알다시피 봄엔 실내가 더 춥다. 난로에 불을 지핀다. 금세 빨갛게 불이 올라오고 훈기가 퍼진다. 이제 제법 불 피우기에 이력이 났다. 냉장고 안에 지난번 농협마트에서 사둔 오이소박이와 막걸리가 떠올랐다. "막걸리엔 김치지..." 며칠 전 텃밭에서 수확한 열무로 담근 햇김치도 접시에 담겼다.


벽난로 앞으로 작은 테이블이 옮겨지고 하얀 병의 미산막걸리와 마주한다. 전통 양조장의 자부심이 살아있는 동네에 살고 있음에랴. 저 난로 속 빨간 불꽃만으로도 한 병은 거뜬할 것 같다. 술병의 엉덩이를 붙잡고 세차게 흔들어댄다. 뚜껑을 따니 거품이 밀려 나온다. 후다닥 생막걸리의 증거물을 혀로 인멸하고 잔에 따라서 한 모금을 들이켠다. 하, 이 맛이다.


난로에 얼른 장작을 하나 더 집어넣고 나서 열무김치 맛을 본다. 아삭하고 풋풋한 것이 짜지도 않고 술안주로 딱 좋다. 칼집 낸 오이소박이 거침없이 한입 베어문다. 시원하고 달다. 덕분에 긴 호흡으로 막걸리를 넘긴다. 내시경 하듯 저 아래까지 내려가는 과정을 상상하며 느낀다. 좋다! 허리를 펴고 몸을 뒤로 젖힌다.


술자리에 음악이 빠질 수 없지. 오늘은 <김광석>의 <혼자 남은 밤>과 <Janis Ian>의 노래만으로 무한 반복이다. 그래, <Nana Mouskori>의 <Even Now>도 끼워주자. 금세 볼이 달아오른다. 오랜만에 '뇌면활성제'가 들어간 티가 난다. <In the winter>는 너무 슬퍼, 그래서 한 모금 더. 비도 오고 그래서...




한 친구가 다녀갔다. 덕분에 모처럼 말을 많이 했다. 텃밭 가꾸기, 가지치기, 나무와 꽃, 집 수선과 난방비 그리고 이웃들과의 관계까지.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덧 배가 고프다. 뚝딱 새로 지은 밥에 참치김치찌개와 몇 가지 반찬을 내서 저녁을 먹었다. 늦은 시간 어둠 사이로 그를 배웅하며 '이렇게 가벼운 만남이 좋지' 생각했다.


얼마 전에도 또 다른 친구가 다녀갔다. 옛 직장동료인데 근처에 볼 일이 있어 왔다가 들렀다. 마침 늦은 점심을 하려던 중이었는데 배고프다 하니 마침 잘됐다 하고 부대찌개를 끓여서 요기를 했다. 한번 다녀간 적이 있기에 그동안 달라진 정원 구경을 시켰다. 불을 피우고 술 한잔 하며 졸린 듯 앉아 얘기를 나누다가 이슥한 밤에 자기 둥지로 떠났다.


매일 만나야 진정한 친구인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랜만에 보더라도 만나서 반가우면 친구다. 자주 보더라도 그 자리가 불편하거나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으면 친구라는 말이 어색하다. 그럼에도 만나야 한다면 그 자체가 번거롭고 스트레스받는 일이다. 그렇게 긴 시간을 살아왔다.


내 입장을 설명하지 않는 삶을 원했다. 내가 정한 자유로운 상태 그대로, 그저 가만히 놓여 있고 싶었다. 언제 한 번이라도 그래 본 적 있었던가? 케렌시아를 가질 수 없는 이유가 많았다. 경제력, 직장, 자녀교육과 시간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관계의 굴레... 그리고 마침내 은퇴의 시간이 왔다.


I'm leaving on a boat 
배를 타고 떠날 거야
For beyond the other side of the ocean
저 바다 다른 편으로
I bet you in the morning,
장담컨대, 아침이 되면
You won't even know I'm gone
넌 내가 떠난 것조차 모를 거야
'Cause I'm tired of living here
난 이곳의 삶에 지쳤어
In the middle of a mixed emotion
복잡한 감정 속에 치이며 사느니
I might as well be living on the other side of the sun
난 태양의 저편에서 사는 게 나을 거 같아


눌러살다 시피 하는 지금, 어떤 이는 시골생활의 불편함만을 내게 주지시키려 애쓰다 가기도 한다. 걱정해 주는 말투지만 나는 안다. 속마음은 그것이 아님을. 그의 말 몇 마디에 내가 이곳 생활을 접고 떠나야 할까? 그 자신은 내 충고 몇 마디로 삶의 모습을 바꿀 수 있을까?


최근 베스트셀러 중에 관계에 대한 책이 많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내밀 예찬’, ‘우리 편하게 말해요’  사회생활의 영원한 숙제이지 싶다. 모두 거기서 거기인 얘기 같지만 그만큼 풀리지 않는 문제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쓰이고 읽힌다. 사람 사이의 문제는 사람으로 풀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걸 보면 거의 무한 루프다.


내 마음을 누군가에게 이해받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공감'을 얘기하고 '역지사지'를 강조해도 내 감정을 똑같이 느껴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얘긴데 좀 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친절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를 다독여줄 사람이야말로 바로 나 자신이니 말이다.




새로 난 꽃이 눈에 띌 때마다 저절로 탄성이 튀어나온다. 맘 졸이며 기다린 만큼의 반가움... 꽃이 피고 지는 동안 반가움, 고마움, 아쉬움 같은 여러 겹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나 꽃은 어떤 마음일까? 자연은 사람에게 아무런 입장을 갖지 않는다. 사사로운 감정은커녕 어떤 생각조차 갖지 않는다.


자연이 좋은 것은 입장이 없기 때문이다. 입장이 서면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고, 위치는 그림자를 만든다. 보이지도 않고 읽히지도 않는, 그 짙은 그림자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던가. 사람과 달리 식물은 딱 그 뿌리의 깊이만큼만 숨기고 산다. 딱 살만큼만.


내가 일군 밭에 씨 뿌리고 물 주어 키운 열무를 안주로 한 잔 기울이는 밤이라니. 열무는 오늘 비 내린 날에, 추위를 느끼고, 불 피우고, 술 생각이 났을 때 안주가 되어주었다. 물론 아내의 솜씨로 음식이 됐지만... 늦은 4월, 실내온도 18°가 춥다며 불 피우고 6°의 술기운을 빌어 혼자인 밤을 데운다. 걱정 말아요, 그대. 태양의 저편일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