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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스 Mar 11. 2023

<유년시절의 기행>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나이 사십이면 얼굴에 책임을 져라"는 말이 있다. 진정 책임질 것은 외양이 아니라 나이 들수록 겉으로 드러나는 내면의 표정이다. 헌데 요즘 이 말이 글자 그대로 얼굴, 즉 이목구비에 책임을 지라는 말로 들린다. 여기에서 먼저 늙어가는 신호가 온다. 특히 눈이 침침하고 치아가 시원치 않다. 주변엔 가는귀를 먹어 대화 중에 딴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책을 읽자니 어느덧 눈이 문제다. 안경을 써야 글씨가 또렷해지니 말이다. 오래 앉아 있다 보면 허리도 자꾸 굽어진다. 마음이 급하다. 나이 들어 누릴 수 있는 것에 책 읽기와 정원 가꾸기 만한 것이 있겠냐고 내심 흐뭇해했는데... 이런 상태로 얼마나 그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결국엔 안경의 두께를 늘려가면서 이 즐거움을 지키려나? 그나마 잘 될는지는 모르겠다.


요즘 전자책에 퐁당 빠져 있다. 책장을 넘기는 감촉은 아쉬운 부분이지만, 글자크기가 조절되고 글꼴도 바꿀 수 있다. 목차를 보면서 건너뛰며 읽기도 용이하다. 20년 넘도록 집 근처 도서관을 이용했는데 시골에 내려오며 여의치 않게 되었다. 인터넷서점에 매달 5천 원을 내고 맘 편히 실컷 보기로 했다. 찾는 책이 없을 때도 있지만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 책 읽기가 진득하지는 못하다. 이 달 들어 손댄 책만도 스무 권이 넘어가지만 완독률은 떨어진다. 모든 책을 다 섭렵할 수는 없다. 재미가 있어야 읽힌다. 그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역시 강한 공감이다. 도서관에선 손때 묻은 표지로 그것을 가늠했지만 전자책은 한결같다. 그래도 일단 선택한 것은 어딘가에 숨겨진 공감대를 찾고자 애쓰는 편이다. 책 한 권 쓰는 것이 예삿일이 아니기에 허투루 대할 순 없다. 


몇 가지 추천하고 싶은 책을 가져와 봤다. 『참 괜찮은 태도』는 KBS ‘다큐멘터리 3일’,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다큐멘터리 디렉터로 일해 온 박지현 씨가 프로그램 취재차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게 15년간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삶의 의미와 단단한 인생의 태도를 배운다. 작가의 진정성과 글의 흡인력은 312쪽 분량이 너무 짧게 느껴질 정도다. 책을 읽으며 울먹인 것이 얼마만인지... 참,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한 달에 5권 전자도서관에서 대여할 수 있다.


"나는 언제쯤 삶이 내 편이 아닌 것 같은 순간까지 긍정하며 ‘고맙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도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기를’」중에서


『어른 공부』는 참어른 양순자 씨의 유작이다. 평생을 올곧게 살다가 암 선고를 받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쓴 글이다. 교화위원으로 30년간 사형수들을 보내며 깨달은 삶의 소중한 가치를 자식 같고 동생 같은 독자들에게 진심을 다해 충고하는 그녀. 지혜롭고 당당하게 살다 간 당신의 모습처럼, 인생에 대한 통찰을 조곤조곤하면서도 시원한 문체로 들려준다. 곳곳에서 읽기를 멈추고 남은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를 깊이 생각한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나를 세탁했어. 2010년 12월 수술하기 전날 일산병원 암병동에서 딸에게 "엄마가 수술실에서 그대로 가면 이렇게 해달라"고 부탁했지.

1. 알릴 곳은 명단에 적힌 23명이 전부야. 여기만 연락하고 나중에 엄마 찾는 전화가 오면"언제 가셨습니다."라고 말해주면 돼. 내 휴대전화 유효 기간은 30일이야. 

2. 오늘 사망하면 다음날 화장해라.

3. 수의 입힌다고 벌거벗겨놓고 새 옷 입히지 마라. 내가 입은 옷 그대로, 엄마가 늘 덮고 자던 홑이불로 나를 덮어라.

4. 조의금은 받지 마라.

5. 가루는 절대 항아리에 넣어 납골당에 두지 말 것. 그때 상황에 따라 너희들이 처리하기 좋은 방법으로 알아서 뿌리고 싶은 곳에 뿌려라.

---「‘ 마무리가 깔끔하면 머물다간 자리도 아름다워’」중에서


노래방을 매개체로, 노래를 듣고 부르며 관찰한 타인과 나에 관한 이야기. 이슬아의 『아무튼, 노래』.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저자는 노래와 함께 인생을 살아왔다. 그렇다고 가수는 아니다. 삶의 의지를 다지며 노래를 부르면 부를수록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다. 어쩌면 가수인 것도 같다. 아무튼 그의 필체는 경쾌하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그의 재치 발랄한 글투에 매료되어 밤을 홀딱 새워버렸다.


삼대가 함께 모여 사는 집 거실에는 노래방 기계가 있었다. 할아버지 한우는 술이 거나하게 취한 날이면 어김없이 집안 식구들을 호출하고 노래방 기계를 틀었다. 할머니 향자는 “먼동이 트면 철새처럼 떠나겠다”고 노래했고, 당숙모는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땜에 내일은 행복할” 거라고 노래했다. 

---「‘태어나보니 노래방이 있었다’」중에서


『지식 편의점 : 문학, 인간의 생애 편』은 시대를 초월하는 25권의 고전 문학을 통해 ‘탄생, 성장, 사랑, 실패, 성공… 죽음, 그리고 그 이후’의 순서로 ‘인간의 생애’를 다룬 책이다. 지식 큐레이터이자 유튜브 [시한책방]의 책방지기인 저자 이시한은 젊은 나이에 참으로 해박하다. 고전문학의 줄거리를 세세하게 얘기하고 배경 지식을 설명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각자의 인생에서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젊은이의 나이도 숫자에 불과하다.


인간의 인생은 그 무거움과 가벼움이 합쳐져서 존재하는 거거든요. 아름다움이나 찬란함은 그것이 한순간이어서 빛나는 것이지 영원히 반복된다면 그 의미가 퇴색될 겁니다. 역사나 시대라는 무거움 앞에 인간은 한번 살고 간다는 가벼움의 미학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중에서


때때로 만화는 독서의 즐거움이 지치지 않도록 해 준다. 『열네 살』은 1997년에 출간된 타임슬립을 다룬 만화로, 작가인 <다니구치 지로>는 우리에게 『고독한 미식가』로 친숙하다. 마흔여덟 살의 중년 남자가 열네 살의 과거로 되돌아간다는 설정이다. 그곳에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다. 실종되었던 아버지의 모습. 어릴 때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던 부모였지만 그들도 사실은 그렇게 단단한 완성체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집 나간 아버지에 대한 의문을 푸는 것이 큰 줄거리지만 내 관심은 주인공의 가슴 뛰게하는 학교생활이다. 


현재의 머리와 그 시절의 몸은 뻔한 설정이지만 쉽게 속아 넘어가는 짜릿한 상상이다. 이 만화와 함께 떠오르는 음악이 있다. 1995년 프로젝트 그룹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발표한 <유년시절의 기행>. 최도원과 테너 김현석의 듀오 버전을 주로 들었는데, 작사 작곡을 한 이혜민은 배따라기로 활동하며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아빠와 크레파스>, <비와 찻잔 사이> 등을 히트시킨 바 있다. 


저물 무렵 빈 운동장에 커다란 나무 아래서 

운동화에 채이는 비를 보며 그 애와 웃곤 했지 


정든 학교를 떠나고 까만 교복을 입던 날 

혼돈스런 날을 보내며 조금 커가는 걸 느꼈지


손때 묻은 가방과 어색한 표정의 사진들이 

무뎌진 나의 가슴에 숨은 기억을 깨우네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반추하는 흑백사진 같은 가사가 타임슬립을 유발한다. 그런데 유년시절의 紀行인지 企幸인지 언뜻 와닿지 않는다. 분명 奇行은 아닐 테고. 어쨌든 나로 말하자면 열네 살에 팝송을 처음 접했다. 우연히 놀러 간 친구집 전축에 꽂힌 해적판 LP 레코드. 종합선물세트 같은 'Greatest Pop 모음'에서 지지직거리며 흘러나온  Eagles의 Hotel California, Leo Sayer의 When I need you, Shocking Blue의 Venus... 단번에 충격적인 신세계로 빠진 잊지 못할 순간이다. 


꼭 소개하고픈 만화가 몇 권 더 있다. "나는 남들에 비해 나을 것 없는 보통 사람"이라는 얀테의 법칙을 모든 국민이 내재화 한 나라 덴마크. 그곳에서 공평과 평등이 어떻게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지 알게 해 준 『만화 어메이징 디스커버리』. 그리고 해방부터 6·29 선언까지 현대사 속 등장인물의 삶을 생생하고 드라마틱하게 그려낸 김세영 작, 허영만 그림의 장편만화 『오! 한강』. 이처럼 내 전자서점 북클럽 서재는 그야말로 "열려라 참깨!"다.





글을 아주 맛깔나게 쓰는 사람, 마음을 흔들어대는 글을 쓰는 작가들을 만나면 다행스럽다. 모르고 지나쳤을 인연일 수도 있었기에 이런 시간을 허락해 준 모든 여건에 감사하게 된다. 얼굴을 마주하고 살아야 사람 사는 것이라는 강박을 가볍게 벗어던지게 해 준다. 때론 오랜 친구보다 그 만남이 더 따뜻하고 오붓하다. 가슴이 열린다. 이런 날엔 어쩐지 내 몸이 더 커진 느낌이다. 숨 쉬고 있는 것에 걸맞은 무언가를 했다는 행복감이 든다.


그렇게 읽다가 커피 한잔 들고 데크로 나가 희뿌연 아침을 맞는다. 날 풀린 봄이라고 채 밝기도 전에 휘파람새가 휘익 휘익, 동틀 녘엔 재재재재 또 다른 새들이 같이 지저귄다. 밤새 깨어 모니터 앞에서 독차지하고 있던 세상을 놓아줄 시간이다. 어쩌나, 이렇게 살다간 눈이 더 일찍 망가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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