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잼스 Jan 20. 2023

해 지고 달이 질 때까지

Vincent, Les Jours Tranquilles, 月亮代表我的心

“바다 보러 갈까?” 꽤나 쨍한 햇살이 아까워서 바다로 갔다. 무창포 해변을 걸었다. 고양이처럼 갸릉대는 썰물의 파도소리가 긴 백사장을 따라왔다. 빠져나간 바닷물이 밑으로 고운 길을 내어줬지만 휑한 바다를 걸어줄 사람은 드물었다. 


바다를 향해 한껏 넓은 창을 낸 가게마다 텅 빈 탁자가 쓸쓸했다. "어서 오세요" 깜짝 놀라 바라본다. 한철 장사에 철 없는 손님이 되었다. 인적 없는 휴양지의 바지락 칼국수는 감칠맛도 그만큼 빠져있고, 카페의 커피는 쓴 맛만 남아있다. 어쩌랴, 창밖에서 탁자 위로 떨어지는 눈부신 오후 햇살에 모두 너그러이 잊힌다.


부드러운 겨울바다를 낮은 햇살이 기분 좋게 간질이고 있었다. 동공을 파고드는 은빛 잔물결에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샛노랗게 부서지던 햇살이 서서히 주홍빛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놓치기 싫었다. 노을은 하늘에만 있지 않고 바다를 거쳐 물결 흔적이 가득한 모래사장에까지 파르르 빛나고 있었다. 풍경風景은 말 그대로 바람과 빛. 빛이 닿는 곳까지 모두 경치景致가 되었다. 


해수면 아래로 깊이 빠져들어가 시뻘겋게 녹아드는 모습을 기대했지만 태양은 내 눈높이 한 뼘도 더 되는 곳에서 회색구름에 갇혀버렸다. 해거름에는 하던 일의 아퀴를 지어야 했다. 붉어지던 해가 사라진 서해 바다를 등지고 돌아오는 길에는 희뿌연 달이 떴다. 검기울어가는 하늘 아래 어스름한 땅거미가 깔렸다.



깨어있는 밤이 잦아지니 지켜보는 밤이 길어졌다. 며칠간 관찰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밤은 해가 져서 어두워진 때부터 다음 날 해가 떠서 밝아지기 전까지의 동안. 그러니까 어두워야 밤이다. 그런데 어둡다는 것은 느낌이다. 시간의 흐름에 맞춰 어둠이 짙어진다는 것은 관념일 뿐 어둠의 농도는 매일 다르다. 그전에도 밤을 많이 보아왔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 자세히 들여다본 것은 처음이다.


음력 보름 즈음엔 달빛이 환하다. 도시의 달은 밝아도 의식하지 못하고 하늘에 머문다. 하지만 시골의 달빛은 마당에 가득해서 사람을 불러낸다. “누가 마당에 불 켜놨나?” 하고 나서면 휘영청 달빛! 신비함에 오래도록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살짝 먼다. 달에는 볕이 없지만 이맘때 달빛은 외투를 걸친 것처럼 나를 감싼다. 달빛을 쬔다. 


달을 머리에 이고 선 동편의 뒷산은 어깨 위에 삼태성을 나란히 얹고 있다. 가장 찾기 쉬운 겨울밤의 오리온 별자리. 맑은 겨울 하늘엔 별들도 한가득, 오늘도 수없이 수소폭탄을 터뜨리며 밝은 빛을 보낸다. 이른 밤 동쪽 산머리 위에 밝은 달빛이 구름 사이를 이리저리 헤매더니 야반(夜半)에 이르러 머리 위로 흐르고 있다. 오랜만에 Don McLean의  "Vincent (Starry Starry Night)"을 들어볼까.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작품에  'F735'라는 밀밭 풍경의 그림이 있었다. 거기엔 떠오르는 해인지, 지는 해인지, 아니면 달인지 모를 주황색 원반이 떠있다. 때문에 한동안 작품 번호로 불렸다. 천체물리학자 Donald W. Olson에 의해 보름달이 산중턱에 걸려있는 단 2분간의 풍경임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달빛에 노랗게 빛나는 밀밭, 《월출(Moonrise)》이다.


고작 오후 나절 본 것만 가지고 완성한 고흐의 몇몇 명작을 보면 그의 관찰력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마티스(Henri Matisse)도 거리에서 지나는 사람들의 실루엣을 순간 포착하는 연습을 했다 한다. 그의 스승인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는 5층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바닥에 완전히 닿기 전에 그를 그려내지 못하면 걸작을 남길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비단 화가뿐만 아니라 모든 지식은 관찰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거기에는 시간과 끈기가 필요하다. '보는 것'과 '세심히 보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그냥 보는 것조차 힘들다. 처음엔 기억과 인식에 기대어 생각하며 보다가 이내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다행히 나는 무언가를 얻어내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 생각이 들어오고 나가는 대로 느낌만을 붙잡고 숨을 쉰다.


밤을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보름달과 달리 야음(陰)의 그믐달은 고독이다. 태양에 기대지 않으니 지상에 그림자를 만들지 않는다. 혼야(夜)를 거들뿐이다. 번짐 없이 거기 있음을 알 정도에서 시선을 묶어 감정이 소모되는 것을 막아선다. 지금은 살아있고 나중엔 죽는다는 것을 알만큼 살았다. 어느덧 삶마다 그만한 사정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떠나고 난 빈자리가 더 크게 보이고 죽은 후에야 생전의 그를 그리워하는 것은, 똑같은 그가 다시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런 삶은 세상에 없다. 그믐달은 그러한 빈자리를 만들 것을 알기에 안타깝다. 다시 채워질 것이지만 같은 달이 아니기에 배웅하고 떠나보낸다. 기울어 가무러져가기에 가련한 달. 제 수명을 다하고 편안한 고종명(考終命)을 맞이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月亮代表我的心  저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죠. 


 ‘낮은 늙은 등(등소평)이 지배하고, 밤은 젊은 등(등려군)이 지배한다’는 말이 나올 만큼 국민가요처럼 불렸다는 "월량대표아적심". 달은 가장 가까이에서 매일 다른 모습으로 밤을 비추지만 별이 될 수 없는 존재. 그래서 기어코 사랑을 확인하려는 것일까? 지구 둘레를 일주하는데 걸리는 29.53일. 그녀가 노래한 달빛은 삭망월(朔望月) 중 어디쯤일까? 


잠들지 못하는 밤은 길다. 지루하고 심심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거나 무언가 해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이 공존한다. 내 눈은 저 멀리 산등성이를 따라 걷는다. 구불구불 내려오다가 산밑에서 어렴풋이 사라지는 능선, 솔잎 사이로 가려지는 가로등, 호수 너머 어느 가옥의 불빛, 실핏줄처럼 하늘로 뻗쳐나간 단풍나무가지. 제법 

어둠이 켜켜이 두껍다. 외려 가로등 빛은 가려진 어둠을 짙게 한다. 암야(暗夜)에 가로막혀 모든 소리도 사라진다. 특히 겨울밤에는 오래 갈아 진득해진 먹빛 차가움이 도사리고 있다. 몰각(沒刻)의 찬 기운이 밤을 더 오래 끌고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눈을 뜨고도 볼 수가 없고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으니 강인한 마음이 필요하다. 옅은 빛, 적은 광량이 오히려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야심(夜深)의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란다. 내 옷깃이 바스락 쓸리는 소리가 거북할 만큼 크게 들린다. 심각할 것 없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마음은 나직이 가라앉는다. 


막아설 건물이 없는 시골의 소음은 크고 멀리 간다. 한때 마을의 밤이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이웃집 강아지가 목을 찢을 듯이 밤새 짖어대서. 도시에 사는 손녀가 할머니에게 맡기고 간 녀석이다. 할머니가 집안에 녀석을 들이지 않은 때문인지, 도시를 떠나 낯선 곳에 온 슬픔 때문인지, 시골 밤의 어둠이 두려운 것인지. 녀석이 그 울음을 그치기까지 반년이 걸렸다. 이제 적응이 된 것인지. 


나도 아직은 비현실적인 이 고요가 익숙지 않다. 내 머릿속의 밤은 여전히 도시에 걸쳐있다. 거기엔 빛과 소음이라는 인위적인 견제와 방어의 기제가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도사린 위협이다. 장시간 어둠과 무음에 맞서 계속 짖어대는 내 심장이 느껴진다. 도시에서 익숙해진 불편이 시골의 낯선 고요에 저항하는 중이다. 


숨죽인 새벽녘, 이처럼 완벽한 고요를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귓전이 찌잉하다. 사늘한 공기에 머리털이 곤두선다. 별 하나가 반짝이지 않는다면 저곳은 하늘이 아니라 그저 시커먼 벽이다. 걷히지 않을 것 같은 적막이 흐른다. 


'보는 것'과 '세심하게 보는 것'의 차이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것을 보고, 내 생각을 더해 보는 작업이다. 밤하늘을 마주하기 좋은 시간이 되었다. 야래(夜來)의 농도가 땅에서 더 짙기 때문이다. 달과 별이 더 높은 어딘가에 있는 이상, 구름 낀 하늘도 어슴프레 빛을 품고 있다. 보지 않아도 인식은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렴풋한 느낌은 더 아련하다. 마치 재스민 향기처럼.


야래향(夜來香)이라 불리는 Night Blooming Jasmine은 밤에 피는 진한 향기의 재스민이다. 낮에는 꽃봉오리를 오므렸다가 밤에 작은 별 같은 꽃잎을 펼쳐서 향기를 내뿜는다. 한 가지에 수많은 꽃송이가 달리기에 향기가 진하다. 


Andre Gagnon의  <Les Jours Tranquilles(조용한 날들)>을 연속해서 듣는다.  다시 아무 일 없는 듯 새벽은 잠잠해진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야분(夜分)을 지나면 가장 어두운 시간은 오전 5시 전후다. 밤이 걷히지 않을 것이라고 너무 성급하게 포기하면 안 된다. 이 어둠에 기대어 여명이 걷히고, 햇귀가 삐죽 나오고, 간밤의 어둠을 밀어내고 부드럽게 돋을볕이 세상을 감쌀 것이다. 


죽음에 버금가는 확실한 미래, 기다리면 아침이 오는 것이다. 내려앉았던 어둠이 서서히 하늘로 올라간다. 저 밑으로 내려간 기온, 여명이 밝아올 때 가로등 불빛이 옅어지는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추울 때이다. 눈 뜨자 아침인 것과 밤을 지나 맞이하는 아침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마치 겨울 견뎌내고 봄을 맞이하듯 아침을 들춰낸다. 다른 계절이면 갑자기 새소리가 요란해질 터인데 추위에 모두 웅크려있는가 보다. 전선에 스무여남은 마리의 까마귀들이 소리 없이 앉아있다. 


이제 달이 떠올랐던 그 언저리에서 아침은 밝아오고 하얗게 서리 내린 마당을 향해 온기를 뻗치려 한다. 이처럼 일상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과 끝이 없이 순환한다. 해 지고 달이 뜨면 다시 해 뜨고 다시 달이 지면서. 익숙한 것과 헤어져 떠나는 낯선 여행의 두려움 속엔 삶의 즐거움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집안일은 끝이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