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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스 Jan 19. 2023

집안일은 끝이 없다

2023년 감사 기도하며 살기

밤과 낮이 바뀌었다. 밤새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는다. 최근엔 OBSw 채널 <전기현의 씨네뮤직>에 빠져있다. 이 프로그램 시작 시간이 오전 두 시다. 좋아하는 영화와 음악을 모두 섭취할 수 있어 좋다. 나는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기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데 멀티플레이어가 치매에 걸릴 확률이 더 높다고 한다. 한 번에 한 가지씩 몰입해서 하는 것이 뇌건강에 좋다는 거다. 잘 모르겠다.


과학서적을 읽다 보니 REM(rapid eye movement) 수면을 발견한 생리학자 클레이트먼 Nathaniel Kleitman을 알게 됐다. 그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낮 동안에 축적된 피로(독소)가 밤잠을 야기하고 잠을 자는 동안 제거된다는 것도, 일시적인 수면박탈이 신체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사실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했다. 이건 다행이다.


밤늦도록 무언가를 꾸역꾸역 하다 보니 느지막이 일어나게 된다. 일어나면 물 한 컵을 마신다. 그리곤 커피를 타서 탁자에 얹어놓고 커튼을 걷는다. 맑은 날엔 투명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가슴을 뛰게 한다. 상쾌한 하루를 맞이한 기쁨에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선룸에 앉아 눈으로 마당을 한 바퀴 돈다. 한편에 걸린 검붉은 곶감에 흐뭇해진다.


환기를 시키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밤새 집안에 쌓인 묵직한 공기를 신선한 외기와 교체한다. 내부 습도를 유지하느라 바짝 마른 수건을 물에 적셔 쥐어짠 후 다시 걸어 놓는다. 실내공기가 바뀌는 동안 향긋한 버터를 녹여 간단히 토스트를 굽고 밀크 커피와 사과 반쪽을 준비한다. 입안에 번지는 버터향과 고소한 맛이 즐겁다. 아침은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먹는다. 사과와 수제 요플레, 커피와 비스킷, 밥을 대신할 간단한 요기로 끝낸다.


모아둔 음식물 쓰레기를 퇴비장에 던져놓고 테라스에 앉아 해바라기를 한다. 호수에 반사된 햇살과 멍하니 눈씨름하는 것이 일과가 돼버렸다. 재빠르게 호숫가 도로를 지나는 차들이 힘차다. 창공을 휘젓는 까마귀가 꺽꺽댄다. 하늘과 구름이 거기에 있다. 바라보이는 곳에.


점심엔 작은 솥에다가 쌀을 씻고 헹구어서 하루 먹을 밥을 짓는다. 고작 밥을 안치고 버튼을 누르는 일이지만 그때마다 밥이 고슬고슬하게 지어지진 않으니 아직 멀었다. 나를 위한 밥상 차리기. 어떤 날은 국으로 또 어떤 날은 찌개로 밑반찬과 함께 상을 차리고 나면 조리라는 것이 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허기를 채우고 나면 치워야 한다. 무념무상의 설거지 시간이 왔다.


우선 어제 씻어 말린 그릇들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기름기 없는 밥솥과 그릇을 먼저 씻고 기름기 있는 것들은 세제를 묻혀 닦아낸 후 물로 헹군다. 나중에 헹군 물로 세제 묻은 다른 그릇을 헹구며 나름 물도 아낀다. 싱크대 안까지 잘 정리하고 나면 개운한 기분이 든다. 슬슬 살림의 맛을 알아간다고 할까? 주방 도구들의 위치가 머릿속에 잘 챙겨져 있다. 그러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눈에 보이지 않아 쉽게 잊힌다.


살림이 익숙해지면서 슬슬 멀티플레이어를 꿈꾼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 세탁기에 빨래를 돌리거나 빨래가 돌아가는 동안 청소기로 거실을 밀거나 하는 것 말이다. 세탁물을 빨래걸이에 너는 것도 요령이 생겨서 주로 옷걸이를 이용한다. 수건이나 양말, 속옷은 널어 말리고 다른 것들은 옷걸이에 걸어 말리면 따로 옷을 개는 작업을 줄일 수 있다. 널린 옷가지가 적으니 가능한 일이다.


하루의 피로와 미련이 묻은 빨래를 세탁 후 헹궈 짜낸 것을 가져다가 탁탁 털어서 널면 마음이 가지런해진다. 햇빛이 좋은 날은 빨래걸이를 밖으로 내놓는다. 이불과 베개도 햇빛을 쬐게 한다. 마른빨래에선 햇살 냄새가 난다. 특히 일광욕을 한 이불에서 나는 잘 마른 내는 잠자리에 행복감을 준다. 어디에도 이만한 향수가 없다.


맛집 찾기에서 먹방과 쿡방까지, 요즘 요리는 방송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유튜브나 블로그에도 레시피가 넘쳐난다. 그러한 대세를 좇지 않아도 끼니를 챙기는 데 많은 시간이 할애된다. 적은 시간을 들여 필요한 맛과 에너지를 얻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바다. 탐닉과 생존 사이에서 생존에 더 치우친 느낌?


"무엇을 먹는지 말하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누군지 말해 주겠다." <미식예찬>을 쓴 장 앙텔므 브리아사바(Jean Anthelme Brillat-Savarin)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얘기할까? 오늘 저녁엔 특별히 공들여 시래기지짐을 해보았다. 시래기를 된장, 고춧가루, 들기름에 무쳐서 멸치와 함께 볶은 후 물을 넣고 한참을 끓여 자작해지면 대파를 얹어 한소끔 더 끓인 후 먹는다. 후훗, 나 자신이 대견하다.


추운 날엔 가끔 난로를 지핀다. 타닥거리는 소리와 불꽃이 귀부터 무릎까지 전해질 때쯤 손을 놓고 생각하기를 멈춘다. 언제 보아도 불꽃은 현란하다. 그러니 위험을 다루는 짜릿함이 있다. 심심하면 철판에 고구마를 얹어 놓거나 출출한 새벽쯤 발개진 알불에 얼려둔 밤을 꺼내 군밤을 만든다. 캄캄한 새벽에 열심히 군밤을 까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는다.




하루를 돌아보는 글이 일기처럼 느껴진다. 사람은 혼자 쓰고 보는 일기에도 때로는 거짓말을 쓴다. 사실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날이 많다. 당장의 즐거움이나 편안함 때문에 중요한 일들을 미룬다.


우리는 보통 <개미와 베짱이>를 도덕적인 이야기로 읽지만, 이는 인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겨울에 먹을 식량을 모으는 대신 여름 내내 파티를 즐기면서 베짱이는 경제학자들이 "시점할인 Temporal Discounting(보상받을 수 있는 미래의 시점이 멀수록 그 보상적 가치가 떨어지는 현상)"이라고 부르는 현상에 굴복했다. 이런 편향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할 때, 우리는 종종 후회스러운 결정을 내린다. <후회의 재발견 -다니엘 핑크>


시험 전날, 평소보다도 유난히 SNS에 올라온 사진들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는 이유. 현재의 소소한 즐거움이 미래의 시험 점수보다 더 큰 가치로 여겨지기 때문이란다. 가지치기, 나뭇가지 치우기, 창고 정리, 글쓰기를 미루고 자꾸 TV앞에 앉게 된다. TV를 틀어놓고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밤잠을 안 자고 하는 일이 고작... 뭐, 그런 날도 있다. 너무 힘주며 살려고 애쓰지 않는다.


은퇴 첫해인 2020년부터 해마다 신년 모토를 정해서 실천하려 노력하고 기록하고 있다. 2020년엔 "설레는 자유"로 정해 여행과 배움을 열심히 추구했다. 제주도를 여러 번 갔고 악기와 그림을 배우려 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올레길을 완주한 것에서 더 나아갈 수 없었지만 나름 의미 있고 행복했던 한 해였다.


코로나가 더욱 심각해진 2021년엔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라고 모토를 정했다. 하루하루 소소한 도전과 변화를 시도해 보자는 것이었다. 지나고 보니 새로운 책을 읽고, 새로운 영화를 보고, 누군가를 만나는 등 난 늘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고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었다.  때론 지루하고 너무나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찰랑이는 물결처럼 조금씩 다름으로 이어진 하루하루였던 것이다. 작년엔 "재미있는 일 쌓기"였다.


2023년은 "감사하고 기도하자"로 정했다. 믿는 종교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불현듯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내 안에 들이고 싶었다.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왔고 혼자 지켜낸 삶이 아니기에 독백하듯 그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창밖이 밝아 눈을 들어보니 밤새 하얗게 눈이 왔다. 아자!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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