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llion years ago, Adele
밥이 잘 됐다. 밥이 잘되면 따로 반찬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맛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손을 넣어 밥물을 맞춘다. 밥솥에 눈금이 있지만 그냥 손을 쓴다. 때문에 쌀의 양이 달라지면 물의 양도 달라져야 한다는 걸 가끔 잊어 고두밥이 되기도 한다. 저녁 반찬은 꽁치김치찌개. 유튜브 저명한 요리사들의 도움을 받는다. 재료가 없어 두부와 양파, 대파가 빠졌지만 그래도 맛있게 됐다. 역시 김치찌개는 김치를 들기름에 얼마나 잘 볶느냐가 관건이다.
하루 한 끼는 조리하지 않고 날것으로 먹는다. 유산균가루를 발효해 만든 요구르트에 사과, 당근, 바나나 등 그때그때 집에 있는 것으로 샐러드를 만든다. 물론 제철이라면 녹색 채소를 빠트릴 수 없다. 양이 부족하면 버터에 구운 빵을 함께 한다. 얇은 햄과 달걀프라이를 얹으면 더욱 좋다. 커피를 끓여 같이 식탁에 올린다. 건강에 좋은 식단이면서 준비가 쉽고 뒤처리가 용이하다. 기름기가 없으니 세제 없이 물로만 씻어낸다. 얼른 뚝딱 그러나 허투루 넘기지 않는 끼니다.
자급자족의 다른 말은 '내 생활 스스로 건사하기'다. 그러니 몸을 움직여 할 일들이 꽤 많다. 그날그날 해야 할 일의 목록을 만들어 놓는다. 아침이면 그중 가장 쉽고 간단한 일을 먼저 한다. 대체로 물주는 일부터 시작한다. 모종과 플랜터박스, 새로 조성한 꽃밭에 애정을 담아 물을 뿌린다. 그렇게 첫 번째 일을 마무리하고 나면 어느새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린다. 급발진을 조심해야 한다. 몰아쳐 일하다가 밥 먹을 때를 놓치기 일쑤다. 가끔씩은 귀찮을 때도 있다. 그러면 뒤로 미룬다. 마음 내킬 때까지. 얼렁뚱땅 보다 그게 낫다.
완전 은퇴 후 첫 봄이다. 5도 2촌 시기와 사뭇 다른 시골의 봄을 몸으로 겪는다. 훨씬 이전엔 건물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일이 아예 없는 날도 많았다. 아침에 지하주차장에서 출발해서 늦은 밤 지하주차장으로 돌아오는 일과 말이다. 지금은 봄볕에 얼굴이 그을리고 손가락엔 방아쇠수지증후군이 재발했다. "봄볕에 거슬리면 보던 님도 몰라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만큼 겨울 지난 살갗이 봄볕에 더 잘 타고 거칠어지기 쉬운가 보다.
때론 바깥보다 집안이 더 썰렁하다. 20도를 넘나드는 큰 일교차 탓에 춘삼월이지만 난로에 불을 지피는 날도 빈번하다. 윤달이 낀 때문일까? 봄이 갈之字 걸음을 하는듯하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새로 돋은 싹과 일찍 틔운 꽃들이 대견하면서도 애처롭다. 할 수 있다면 마당의 모든 꽃과 새싹을 안으로 들이고 싶을 만큼. 자주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비와 바람, 햇볕과 기온에 따라 해야 할 일들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내일 비소식이 있다. 비 오면 흙 속의 뿌리가 활착 하기 좋기 때문에 나무 옮겨심기 적당하다. 그동안 화분에서 키우던 고광나무와 키 작은 병꽃나무를 오래 머물 자리로 옮겨주었다. 철쭉사이에 어깨가 끼어 눈에 띄지 않던 진달래도 다른 곳으로 옮겨 심었다. 화단 턱에서 자라던 무스카리. 작년에 대여섯 개 핀 것을 봤는데 올해 띄엄띄엄 열개나 꽃을 피워 올렸다. 기특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새로 만든 화단에 일가를 이루도록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우수관(雨水管)을 살펴본다. 흙탕물이 가라앉아 막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미리 점검한다. 마당 경사가 잘 잡혀있어 물이 고여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옥상 배수관이 겨울에 얼어 터졌는지 위에서 내려오는 물이 벽을 타고 흐른다. 다시 비 오기 전에 작은 홈통을 끼워 넣고 실리콘으로 마감한다.
옥상에서 내려다보니 차양 빗물받이에 흙과 낙엽이 엉켜 가득 차 있다. 바로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긁어내 숨통을 터준다. 심각하진 않지만 마당 곳곳의 틈새는 시멘트 몰탈을 물에 개서 보수한다. 이런 작업들을 뚝딱해 내는 나 자신이 때론 신기하다. 초보 수준이지만 페인팅, 미장, 목공, 코킹, 전기 등 일단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해본다. 어느 것 하나 예전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다.
제법 응용력도 생겼다. 모종판이 부족해 대용으로 달걀판을 이용해 보니 그럴싸하다. 농마트에 가기 번거로워 시도해 본 것인데 꽃모종을 키우기엔 그럭저럭 괜찮다. 재활용에 환경보호는 덤이다. 애호박과 오이, 꽃모종 몇 가지는 넉넉히 만들었다. 이웃들에게 선물로 나눠줄 생각이다. 생초보 정원생활자가 시골분들에게 모종을 길러 선사하기에 이르다니... 흐뭇하고 즐거운 발전이다.
감자밭두둑은 지온을 높이기 위해 투명비닐로 멀칭 해주었더랬다. 어느 날부턴가 풀빛이 비쳐 살펴보니 무성한 풀들이 비닐을 밀어 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강인한 생명력이 기함할 만큼 놀랍다. 비닐이 들뜨면 보온효과도 떨어지고 흙이 마르기 때문에 작물의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된다. 뽑아내기도 어려워서 아예 걷어내고 검은 비닐로 갈아주었다.
내친김에 오이와 호박 심을 두둑에 지지대를 세우고 퇴비를 두둑이 넣어 주인 맞을 채비를 마쳤다. 완두콩, 양배추에 이어 옥수수 모종도 정식을 했다. 플랜터박스에서 훌쩍 자란 열무가 김치로 탈바꿈할 날이 멀지 않았기에 뒷텃밭 여유 공간이 있어 열무 2차 파종을 했다. 이웃에게 선물할 새깃유홍초도 모종판에서 작은 포트로 옮겨 심었다. 모두 봄이기에 준비할 수 있는 소중한 순간들이다.
전업농사는 생계와 굳은 각오가 필요하지만, 정원 가꾸기는 부담과 심각함을 내려놓는 편이 더 낫다. 많은 씨앗을 뿌렸지만 아직까지는 욕심이 앞서 시기와 여건을 헤아리지 못했다. 큰 기대감을 덜어내고 관심과 애정을 주면 식물도 살기 위해 오롯이 애쓴다. 잔디를 걷어내고 만든 화단에 화려한 튤립과 감미로운 색감의 이스라지가 화사하게 피었다. 사실 동백도 보리수도 심기야 사람이 했지만 제 스스로 자라고 꽃 피운 것들이다.
가장 모진 훼방꾼은 도시에서 생활하며 깊게 밴 조급함이다. 빠른 결과를 얻기 위해 서두르는 것이 결코 빠르지 않음을 배운다. 정원과 텃밭이 인위적으로 조성된 것일지라도 이 또한 자연의 시간에 맞추어 간다. 기온과 시간, 토양 등 여건이 조성되어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얼렁뚱땅은 없다. 그러하기에 정원은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다. 뚜벅뚜벅 자연의 걸음걸이를 따라 인내하며 끝까지 가는 힘을 배워야 한다. 나의 '얼른 뚝딱'은 하루 한 끼만.
I wish I could live a little more
Look up to the sky, not just the floor
I feel like my life is flashing by
나 조금만 더 하늘도 보며 살았더라면,
땅바닥만 보지 말고
인생이 쏜살같이 지난 듯해
I only wanted to have fun~♪으로 시작하는 Adele의 Million years ago. 지금의 삶에 백만 년의 회한이 남지 않도록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