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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스 Nov 15. 2023

전원생활, 꽃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아요

봄날은 간다, 백설희

기온이 뚝 떨어졌다. 두렷대는 두 눈은 아침 찬 기운에 말똥말똥한데 몸은 따뜻한 이불 안에서 뭉그적거린다. 창틈 곳곳을 틀어막았지만 웃풍이 드세다. 소통이 잘 되는 구조다. 꼼지락거리며 ‘보일러를 틀 때가 된 건가?’하고 중얼거린다. 난방비 아끼느라 머뭇거려 왔다.     


이른 아침부터 화목난로에 장작을 몇 개 넣고 불을 피운다. 불꽃이 나무에 쉽게 달라붙지 않는다. 매캐한 연기를 내보내느라 창문을 활짝 연다. 외려 찬 바람을 안으로 들인다. 가까스로 불을 지폈지만 실내 온도는 더 떨어진 느낌이다. 얼른 옷을 껴입는다. ‘진작 이럴 것을’하고 툴툴거린다.     


급강하한 기온에 단풍이 화들짝 놀랐다. 이미 헐벗은 감나무엔 홍시 몇 알이 불그레 남았다, 밤나무, 모과나무도 낙엽 떨군 가지가 하늘을 찌를 듯 뾰족하다. ‘어쩜 늙는 것이 순식간이구나’. 나도 몰래 주절거리는 세월이다. 좋은 시절 다 갔다. 혼잣말이 느는 걸 보니.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시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백설희의 노랫말이다. 여러 가수들이 커버 곡을 불렀고 영화 제목으로도 쓰였지만 곡도 가사도 봄날의 화사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슬픔과 회한이 깊게 밴 여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봄날은 간다’에 봄이 없듯이 전원생활에도 기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원생활엔 성가신 일이 다반사     


이젠 물까치 울음소리가 신경에 거슬린다. 지난 오뉴월, 새끼 깐 둥지를 지키느라 나를 공격했을 땐 ‘다시는 내 정원의 나무에 집을 짓지 못하게 하겠노라’고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곤 했다. 제 발의 피만큼이나 내가 위협적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즈음 벽돌 마당엔 틈새마다 잡초가 무성하고 바라는 꽃은 더디 핀다. 때론 바람이 때론 비가 피자마자 눕히기도 한다. 예쁘다고 모두 좋은 것도 아니다. 앙증맞은 유홍초는 애먼 홍가시나무를 칭칭 감고 졸랐다. 농약은 딜레마다. 선녀벌레 하얗게 낀 나무를 보면 내 속도 뿌옇게 흐려진다.     


장마 기간엔 곰팡이와 전쟁을 치렀다. 여름일지라도 보일러를 틀어 집안을 보송보송하게 만들었어야 했다. 내가 견딜 수 있다고 모두 같은 상태인 것은 아니다. 가구가 그랬다. 책장, 의자와 탁자, 서랍장 특히 액자 뒤판이 참혹했다. 마티스도, 클림트도 맥없이 뒤통수를 맞았다.     

 

사방에 널린 거미줄을 여러 차례 걷었다. 처마, 나무 심지어 집안까지. 참으로 웹은 월드와이드하다. 검어서 거미라지만 정원에는 대체로 줄무늬의 호랑거미와 화려한 무당거미가 대부분이다. 자기 영역에 민감해서 좁은 공간에선 서로 잡아먹는다. 그래서 거미줄이 여기저기 사방에 널렸다.      


추워진 덕에 가을 모기가 사라졌다. 집 안 모기와 달리 바깥 모기는 야수다. 귓전을 후비는 ‘애앵~’ 소리에 대번 소스라친다. 정원을 가꾸다 보면 뜯긴 팔다리에 벌건 꽃이 가렵게 핀다. 이제 맘 놓고 맨살을 드러내려니 날씨가 싸늘하다.      


누릇해진 잔디마당 위에 떨어진 솔잎이 수북하다. 갈퀴로 긁어모으니 솜뭉치처럼 뭉뚱그려진다. ‘네가 태어난 흙으로 보내주마.’ 산성토양을 좋아하는 블루베리 화분에 깔아주면 되겠다. 낙엽 긁는 계절, 화단에 겨울 이불로 이만한 것이 없다. 수시로 모아 나르는 내 수고를 그들은 알까 모르겠다.   


 

집을 돌보는 것도 전원생활     


시골집은 살아있다. 노화 속도가 빨라서 탈이지만 말이다. 수시로 손 볼 곳이 생겨난다. 처마와 데크에 페인트를 칠하고, 물 새는 차양을 때우고, 양변기 부속을 갈고... 때론 ‘내가 이런 것까지?’ 하는 뿌듯함이 샘솟기도 한다. 자주 하다 보니 이렇게 청지기가 되어가는구나 싶다.      


작년 겨울엔 옥상 배수관이 얼어 터졌다. 처마에서 바닥까지 초대형 고드름이 열렸다. 다행히 꼭 맞게 가는 배관으로 틀어막았지만 얼음이 녹는 봄까지 노심초사했다. 지난 장마엔 누전으로 정전이 되기도 했는데 이후로 배관과 전기 문제가 생기면 조마조마하다. 손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라서 더욱 그렇다.   

   

가장 맥 빠지는 것은 일하던 중 필요한 물건이 매번 없을 때다. 드라이버로 나사를 박다가 드릴이 필요할 때, 줄자를 잊고 왔을 때, 호미만 들고 왔는데 삽이 필요할 때. 다시 돌아가 찾지만 있어야 할 곳에 없을 때 기운이 빠진다. 흐름도 끊기지만 마당이 넓어서 한참 걸린다. 이젠 머릿속으로 그림을 여러 번 그려 본 후에 일을 시작하는 습관이 생겼다.      


창고는 왜 늘 지저분할까? 채우는 곳일까? 비우는 곳일까? 나름 정리한다고 하는데 잡다한 물건이 쌓여만 간다. 비닐, 부직포, 비료, 농약, 상토, 농기구, 농자재, 목재, 공구 등등. 네 개의 공간이 저마다의 이유로 빽빽하다. 이처럼 쓸모가 있을 듯해서 쟁여놓는데 정작 찾으면 없는 머피의 창고다.     

 

사계절을 시골에서 보내고 보니 그럭저럭 잘해왔다. 시간이 흘렀고 5도 2촌의 시기보다 조금 더 눈이 뜨인 느낌이다. 이제 다시 추워지고 긴 겨울을 맞는다. 수선화, 튤립 같은 구근식물에겐 보약 같은 추위다. 웃자란 나무 가지치기 적당한 계절이고 어수선한 집 안팎을 정리하기 좋은 시간이다.      


꽃이 피어야만 계절이 아니다. 아름답고 기쁜 일만 있어서 기억이 화사한 것도 아니다. 성가신 일을 잘 돌보는 하루하루가 무채색의 배경을 만들어 갈 때 일상이 인생이 된다. 그렇게 또 봄날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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