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을 잤다. 다행히 해가 중천에 뜨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커튼을 올려보니 비가 내린다. 고맙다. 새로 만든 꽃밭에 금어초, 메리골드, 천일홍, 달리아, 프릴드로즈, 버베나, 과꽃, 붉은꽃아마의 새싹이 다디단 빗물을 받아먹겠지? 텃밭에선 먼저 자란 완두콩, 양배추, 감자, 열무, 상추, 브로콜리, 치커리, 시금치가 황사로 더러워진 몸을 씻어내며 어푸어푸하고 있을 것만 같다. 비 온다고 어제 잔디와 화단, 화분에 비료를 뿌려주었으니 비 그치면 녀석들 모두 살이 오를 것이다.
촉촉이 내리는 비라서 부산스럽지 않다. 우산을 쓰고 마당 곳곳을 순례한다. 빗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땅에 고개를 처박은 수선화 발 밑에 슬쩍 돌을 괴어주고 허리띠도 매어 준다. 많은 풀들이 빗물을 튕기고 있다. 머위, 질경이, 괭이나물, 쑥과 망초처럼 밭에 있으면 잡초지만 밥상에 오르면 나물인 것들. 민들레, 괭이눈, 지칭개, 주름잎, 바랭이, 쇠비름... 이름 모를 들풀들이 참 많기도 하다. 꽃이 피어야 들풀인지 내가 심은 꽃인지 알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미천한 이력의 정원생활자는 수레국화와 꽃양귀비, 자운영 등 지난가을에 파종한 꽃들과 구분을 못하고 있다.
빗물이 식물에 좋은 양분을 많이 갖고 있다 하니 선룸의 모종도 밖으로 꺼내놓는다. 오늘 같은 가랑비엔 모종판의 흙이 패이지 않고 촉촉하게 스며들어 좋다. 내친김에 빈구멍마다 에키네시아를 파종해 본다. 오이와 애호박 모종도 텃밭에 내다 심었다. 좀 이른 감은 있지만 적당히 자라긴 했다. 떡잎 외에 본잎이 두 세장 나온 것들이다. 지주대는 심을 자리를 잡기 위해 미리 설치해 두었다. 어설픔이 묻어나 마치 요새처럼 보인다.
비 오는 날에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적당한 일거리 하나. 페트병 밑에 구멍을 뚫어 '반자동 점적관수통'을 만든다. 아주 미세한 바늘로 뚫어야 오랜 시간 찔끔찔끔 물이 공급된다. 집을 비울 때나 오이처럼 물을 각별히 좋아하는 채소에 유용한 도구다. 실험해 보니 한 병으로 약 20시간 이상 물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페트병은 다양한 용도로 쓰기 때문에 그동안 많이 모아 두었다. 깻묵 액비를 만들거나 유해동물 퇴치용으로도 쓴다.
뭘 먹을까 하다가 비빔국수가 떠올랐다. 스님들은 국수 먹는 날이면 허리춤을 풀고 양껏 먹는다는 얘기를 몇 번인가 들었다. 초야에 묻혀 사니 나도 수양하는 그들의 식성과 비슷해진 걸까? 유튜브를 뒤지니 요리하는 탤런트 '어남선'의 아주 간단한 비빔장 레시피가 눈에 띈다. 설탕, 참기름, 고추장 각 세 스푼에 다진 마늘 한 스푼. 이보다 더 간단한 방법이 또 있을까? 당장 국수를 삶고 만들어 본다. 아, 양은 좀 줄여서 같은 비율로 만든다. 음,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다. 화분에서 따온 아스파라거스를 볶아 곁들인다. 아삭하고 달짝지근하다. 사과 반쪽으로 입가심하고 나니 비가 조금 잦아든다.
어느새 단풍나무잎이 무성해지고 붉은빛이 많이 가셨다. 집채만 한 청단풍은 붉은 새잎이 파랗게 변해 크다가 가을이면 단풍으로 다시 빨갛게 물든다. 옆에 있는 홍단풍은 일 년 내내 붉은 잎이지만 가을엔 좀 더 붉게 단풍이 든다. 앞산에 녹음이 푸르다. 드문드문 벚나무가 남아있지만 아주 말간 연둣빛에서 짙푸른 색까지 다양한 녹색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잔디도 푸른기가 돈다. 물까치가 떼로 날아와 연신 마당을 쪼고 있다. 무언가 먹을 것이 있나 보다. 옆집 소나무를 기어오르는 새가 있어 뭔가 하고 보니 엉덩이 빨간 딱따구리다. 박새도 나뭇가지에 앉아 쉼 없이 뭐라 뭐라 조잘거린다. 비 그치니 사방에서 이름 모를 새들이 각기 다른 목소리로 지저귄다.
흰색의 수선화와 이베리스 그리고 사과꽃, 선홍색 영산홍, 분홍빛 꽃잔디와 연분홍 모과꽃, 빨간 할미꽃과 동백꽃, 자줏빛 라일락과 제비꽃 그리고 하늘매발톱, 노란 황매화와 노랑, 빨강, 아이보리의 다채로운 튤립 등 마당은 그야말로 색의 향연이다. 붉은색이라 해서 다 같은 그 색깔이 아니다. 영산홍이나 튤립을 보고 있으면 사람이 표현해 낼 수 없는 색이란 생각이 든다. 진해도 이보다 진할 수 없고 설탕 코팅이 된 것처럼 반짝인다. 오직 눈으로 보아야 그 색감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이제 어둠이 내렸다. 종일 비가 왔지만 그래도 태양광등에 따뜻한 조명이 깃든다. 이처럼 아득한 저녁엔 Carla Bruni의 읊조리는 목소리가 제격이다. 마치 랄리벨라 튤립의 꽃잎처럼 매혹적인 음색에 젖어든다. 계절에 어울리는 'Spring Walt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