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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콜랑 Nov 06. 2015

담화 구조와 이데올로기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

요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으로 정치권이 시끄럽다. 이 문제에 관한 TV 토론 프로그램을 지켜 보면서 말이라는 것이 참 묘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토론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팩트(fact)'라고 하는 사실성이다. 토론 자료가 사실이 아니면 논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그래서 토론 수업을 진행할 때에도 가장 강조하는 것이 이 팩.트.이다. 토론 자료의 사실성과 객관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토론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토론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테제인 것 같다. TV 토론회에 참여하는 토론 참가자들이 하나같이 '팩트'를 강조한다.


그런데 다른 때는 잘 몰랐는데 이번에 절실히 느끼게 된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토론에서 자료의 사실성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토론의 자세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토론의 올바른 자세는 언어학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두 입장의 차이는 기존의 역사 교과서를 두고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인데, 이 해석 과정에 언어학적 고려가 필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구조가 인간의 생각에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머리 속에 있는 내용을 어떻게 글로 풀어야 할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일단은 설명해 보기로 한다. 우선,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관한 두 토론 진영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반대 입장: 세계화의 추세에도 역행할뿐더러,

                     학생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하게 한다.

                    *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교과서를 독재 정권의 길들이기 수단으로 전락시킬 위험성이 있다.

    찬성 입장: 교과서를 다 공부하고 나면 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한 수치심을 갖게 된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이승만 정권의 공적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거치는 과정에서 이룩한 산업화의 공적에 대한 서술이 거의 없다.

                     * 북한을 찬양하는 듯 서술하고 있거나 북한의 과오를 얼버무리는 듯한 서술이 많다.


이와 같이 두 토론 진영의 기본적인 입장을 정리하고 보면 두 진영이 소위 '팩.트.'라는 자료를 제시하면서 토론하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찬성측이 제시한 팩트(즉, 논거: 역사 교과서의 특정 서술 부분)와 그 해석에 대해서 반대측이 제시하는 팩트(즉, 논거: 역사 교과서의 특정 서술 부분)는 서로 동일한 부분이 아니다. 동일한 팩트를 두고서, 다시 말해 상대측이 제시하는 자료를 가지고 고민하는 토론자의 자세는 찾아볼 수가 없다. 자신이 조사하고 자신에 제시하는 자료에 기초하여 형성된 자신의 의견은 조금도 굽히지 않는다. 찬성측에서 제시한 자료와 그 해석 부분을 보면 위에서 정리한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표시 주장은 예외). 반대측에서 제시한 자료와 그 해석 부분을 보면 역시 위에서 정리한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표시 주장은 예외).


역사 교과서를 자세하게 들여다 본 적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으며, 평소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로 인한 갈등에 짜증을 느끼고 있는 필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위에서 정리한 '*' 표시 부분에 관한 주장에는 두 진영 모두 색안경을 쓰고 과도하게 해석하는 측면이 없지 않아 보였다. 찬성측과 반대측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핵심 문제는 결국 하나식인 것 같았다. 민중의 희생에 의한 민주화 과정과 그 대척점에 있는(이론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대한민국의 근대사에서는 그런 것처럼 보임) 독재 정권 주도의 산업화, 그리고 그 결과물이라고 보이는 계급 갈등의 심화. 이를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다룰 것인가의 문제처럼 보였다. 그 비율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온갖 자료를 제시하면서 토론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처음부터 상대 진영이 제시한 자료를 가지고 자신의 안경에서 색을 지워내려는 노력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토론이라는 소통 구조가 기본적으로는 찬/반 입장을 정하고 시작한다고는 하지만 상대방의 자료와 그 해석 방식에 대하여 나는 나대로의 자료와 해석을 들어가며 반박하려고 한다면 애초부터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기보다는 '갈등'을 목적으로 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민주사회에서 토론이 '갈등'을 부추기기 위한 소통의 형식이라고 보아야 할까? 아닐 것이다.


토론에 참여할 때는 자신이 준비한 팩트만 볼 것이 아니라 상대가 준비한 팩트도 보아야 한다. 상대가 준비한 팩트를 보더라도 나의 주장이나 생각이 정당할 경우에 자신의 주장을 더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다. 상대가 제시한 자료를 보면 나의 주장이 퇴색된다면 내 주장을 더 강하게 제시할 수 있는지를 재고해야 한다. 그것이 토론자의 자세이다. 혹시 상대가 자신의 자료만 보고 있다면 차분하게 내가 제시한 자료를 가지고도 상대방의 주장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는지를 고려해 보도록 도와야 한다. 토론자의 자세가 중요하다. 팩트를 바탕으로 토론해야 한다는 테제만큼, 아니 이번 사태를 보건대, 상대방이 제시하는 팩트를 가지고도 나의 주장이 유지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면서 토론해야 한다는 테제는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해 보인다.


다시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관한 토론으로 돌아오자. 찬반 두 진영에서 제시하는 자료를 보면 두 주장이 모두 타당해 보인다. 다만, 문제는 위에서 '*'로 표시한 주장과 관련해서는 두 진영이 모두 색안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 입장에서는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추측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과연 '오류'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고 그들이 미리 걱정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토론이라는 소통 방식만을 놓고 보면 그렇다고 생각된다. 찬성 입장에서는 거칠게 말해서 '뒷맛이 안 좋다'는 느낌에 근거해서 기존 역사 교과서를 좌편향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그 비판 정도가 아무리 봐도 좀 심해서 색안경을 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뒷맛이 나쁜' 정확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측에서는 그 논리를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언어학적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찬성측에서 비판의 정확한 근거를 정확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느 정도 이해되기 때문이다. 논리학, 수사학, 텍스트학 등에서 어떤 구체적인 언어적 장치가 어떤 심리적인 인상(즉 뒷맛)을 남기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연구가 잘 되어 있었다면 반대측에서도 지금처럼 자신들이 준비한 자료를 제시하면서 동문서답하지 않고 찬성측의 '뒷맛이 나쁘다'는 이유에 대해서 엄밀하게 추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찬성측에서도 자신들이 현행 교과서를 왜 좌편향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언어학적 지식에 기초한 논증이 있었다면 애시당초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정치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훌륭한 교육 전문가들 사이에서의 건전한 토론 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특정 표현을 두고 색안경을 낀 해석과 그게 왜 그렇게 해석되느냐는 또 다른 해석은 분명 언어의 문제이고, 이 언어적 해석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이번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은 이데올로기적 해석의 틀에서 독립하기 어려워 보인다. 수사학, 텍스트학, 논리학, 인지과학의 협업을 통해 특정한 언어 표현이 어떤 뒷맛을 남기게 되고, 또 뒷맛을 남기지 않는 언어 표현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연구는 날로 갈등이 심해지는 사회에서 건전한 소통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해 보인다.


(사실, 이 문제는 서양 철학의 오래된 연구 내용이었으며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자연 언어의 논리는 '뒷맛' 때문에라도 수학 기호, 논리식 기호, 프로그래밍 언어 등과 같은 인공 언어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100% 논리적인 언어만 사용하는 사회가 있다고 가정해 보면 그 사회는 얼마나 차갑고 냉혹할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은 그런 사회를 이상향을 표방하는 비이상향으로 묘사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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