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 기만적인 축복

돈 놓고 돈 먹는 시대

by 콜랑

부(富).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추구하지 않은 적이 없는 것 중에서 객관화된 측량이 가능한 것 중 하나이다. 그리고 축적해 둔 부나 생산의 밑거름이 되는 수단까지 통틀어 '자본(資本)'이라고 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바로 이 자본을 추구하는 행위를 바탕으로 수립된 경제 질서이다. 당연히 '자본주의'는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경제 질서의 근간이 되는 사조'라고 할 수 있다. '시장자본주의, 수정자본주의, 국가자본주의, 정보자본주의' 등등 다양한 면모를 띠더라도 자본주의 사회는 본질적으로 이윤을 추구한다. 이윤이 남아야 재산이 불고, 부가 쌓인다. 자본이 증식한다.




세상에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이윤을 나만 추구하는 것이 아닌 한, 나와 남을 비교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자본의 축적 정도 역시 비교하고 싶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 때 요긴한 것이 화폐다. 화폐에 매겨진 일정한 가치를 바탕으로 부의 정도를 객관화하면 나와 다른 사람의 부를 비교할 수 있다. 자산의 가치도 화폐 가치로 매겨지면 비교가 가능하다.




인간의 욕망에는 끝이 없다던가? 비교의 결과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부를 가지고 싶은 욕망을 잉태한다. 이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경제 활동의 결과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이윤을 남겨야 한다. 내가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는 내가 속한 집단(기업, 지역 사회, 국가 등)도 비교 우위 수준의 이윤을 내야만 그 이윤을 일정한 조건(분배 절차)에 따라 나누어도 내가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다. 집단 내에서도 이윤 분배 조건에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많이 부합하면 좋다. 이윤 추구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그것은 본질상 능력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능력은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는가로 평가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인간은 누구나 동일한 시간을 사용하기 때문에 동일 시간을 투자해서 더 많은 이윤을 내는 것이 보다 경제적이거니와 보다 뛰어난 능력을 전시하는 방법이다. 인류는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 즉,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위해서 무엇을 했던가? 아주 옛날에는 금과 같은 값비싼 재화를 보다 많이 생산해야 경제적이었다. 재화의 생산이 주된 경제 활동이었다. 생산 노동력이 자본의 근간이었고 이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경제성의 핵심이었다. 그러다가 산업 혁명 이후 재화가 풍족해지고 생활에 꼭 필요한 것 이상의 재화들을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자본은 생산보다는 유통으로 쏠렸다. 여전히 노동력이 자본의 근간이지만 이제는 생산 노동력보다는 유통 노동력이 경제성의 핵심이 되었다. 유통 노동력같은 비생산적 자본(유통 마진)에 눈을 뜨게 되면서 금새 서비스 노동력도 경제성의 핵심이 되었다.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들에서 심리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들로 자본의 쏠림이 발생했다. 가장 필수적인 욕망부터 잉여적이지만 쾌락적인 욕망으로의 가치 변화가 자본의 쏠림의 변화에 반영되어 있다.




자본의 쏠림의 변화는 '자본'의 본질에 변화를 초래한다. 스마트한 은행가들은 미래를 담보로 이윤을 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만약 내가 가지고 있는 자본을 당신에게 빌려주면 그 동안 나는 생산을 못하니 그에 대한 댓가로 원금에 이자를 더하여 갚아 주세요. 일리가 있어 보인다. 스마트하다. 이제 이자는 이윤의 다른 말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이자'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경제 질서로 변모하게 된다.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가 존재하게 된다. 더 이상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가치에 해당하는 이윤을 분배하지 않아도 된다. 화폐발행량을 늘리고 이윤을 분배하면 된다. 이자 수입이 이윤이 되면 세계 경제의 성장은 이자를 담보로 성장한다. 물질 재화의 생산이 없어도, 특별한 노동력의 제공이 없어도, 자본은 스스로 증식한다. 자산 가치 증식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얼마나 많은 화폐를 발행해야 자본주의는 유지될 수 있을까? 기업이나 국가와 같은 거대 자본 주체가 소유한 자본의 총량은 인간 생필품의 경제와는 무관하므로 망하지만 않으면 된다. 개개인의 경제 주체가 소유한 자본의 총량이 커저도 더 많은 화폐를 발생하면 얼마든지 경제 성장을 유지할 수 있다. 국가 간 환율을 고려하는 건 조금 복잡하지만 극단적으로는 폐쇄 경제 시스템을 만들면 환률을 무시할 수 있다. 서민들이 적당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정도의 자산 가치를 유지하도록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통화 정책을 펼치면 된다. 거품이 끼면 빼야 되고, 자산 가치가 빠지면 부양책을 써야 된다. 그러면서 전체 경제 규모는 성장해야만 한다. 코로나같은 재난은 가능한 없을수록 좋다.




문제는 전 세계에서 매년 늘어나는 통화량 즉 성장하는 경제 규모가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1/n로 분배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자가 자본의 근간이 된 사회에서는 자산이 많을수록 이자 즉 분배받는 이윤이 많다. 가진 사람은 놀아도 더 가질 수 있게 된 것이고 덜 가진 사람은 죽어라 노동력을 제공해도 더 가진 사람과의 차이를 극복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종국에는 없는 사람은 빚을 갚기 위해 생을 보내게 되고 있는 사람은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적당한 거품은 가진 자들이 더 많은 불노소득을 누리게 하면서도 못 가진자들이 별다른 불만을 느끼지 않도록 해 주는 완충 기제인지도 모른다. 부익부 빈익빈은 단순한 직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 질서의 분배 질서의 민낯을 드러내는 말이 될 수밖에 없다. 재화, 유통, 서비스, 인기, 데이터 등등 경제성 추구를 위한 노동력 제공의 핵심 요소들은 모두 이자를 더 많이 받기 위한 경제활동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표면적인 자본주의 경제현상일 뿐이다. 재화, 유통, 서비스, 인기, 데이터 등을 생산해서 경제성을 높이고 더 많은 부를 쌓아서 부자가 되려는 대부분의 경제주체들의 운명만 복잡하고 난해해진다. 복잡하고 난해한 표면에서 열심히 헤엄쳐도 본질로 통하는 구원을 경험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오늘날에는 인간의 욕망이 부 자체로 옮아가고 있다. 요즈음은 인기 노동력이나 데이터 노동력이 고수익 경제활동의 핵심이 되고 있다. 데이터가 중요시되고 개인 방송 플랫폼이 일반화되면서 최근에는 가장 경제적인 노동은 '인기'와 '데이터'를 생산하는 노동이 되고 있다. 4차 산업 혁명의 지표인 데이터의 가치로 부의 중심이 옮아가고 있다. 이제는 인간이 느끼고 향유하는 어떤 쾌락이나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에 대한 ‘인기’로 부가 가치가 옮아가고 있다. 심지어는 부 자체를 증식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가고 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버는 사회가 아니라 빚을 갑기 위해 먹고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자본의 시스템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우리는 어느새인가 부에 대한 자신의 욕망이 인간인 자신의 욕망인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의 욕망인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미래를 담보로 세상을 갈아넣도록 강요하는 경제 구조가 자본주의의 본질이 되었다고 통찰(?)하는 건 나만의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를 이야기하는 경제학자 어느 누구도 이자에 기초한 경제 질서가 미래를 담보로 세상을 갈아 넣는 병든 경제 질서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다. 경제 질서의 근간에 인간성, 공동체의 복지 등이 보다 충분히 고려되지 않는 한 자본주의는 사실상 이자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자를 당연시하는 질서에서 타인의 미래를 갈아넣어서 나의 자본을 증식하는 행위는 당연시된다.




생각해 보면 '이자'라는 것이 묘하게 기만적이다. 내가 지금 이 자본을 당신에게 빌려주면 나는 더 많은 생산을 할 수 없으니 이자로 받겠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기만적이다. 빌리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당장 돈(자본)이 필요하니 그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겠지만 잘 생각해 볼 일이다. 내(채무가)가 지금 이 돈을 빌리지 않으면 당신(채권자)은 당장 그 돈을 생산에 투입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돈을 여유자금으로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었을 것 아닌가? 조금 극단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렇다. 수 조원씩의 자산을 가지고 있는 자본가는 그 돈을 당장 생산에 다 투입할 능력이 있는가? 수십 억은 그럴 수 있어도 수 조원은 그렇게 하기 어렵다. 수 십조는 더 어렵다. 수 백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극단적이지만 논리상으로는 여유 자본은 당장 생산에 투입하지 못하고 있는 자본이다. 전 세계적인 규모로 확장해 보면, 자본은 기만적이다 못해 악의적이다. 경제 성장을 위해서 인류는 자신들의 미래를 갈아넣는 방식의 삶을 스스로에게 강요하고 있는 꼴이지 않은가!




자본주의. 인류에게 풍요를 가져온 축복이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런 것일까? 이자라는 숫자를 바탕으로 인류가 자신의 미래를 갈아넣도록 기만하는 경제 질서로 변모해가는 것은 아닐까!? 설마... 기만적인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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