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의, 함축, 전제 그리고 편파의 사회 언어학
유튜브 방송을 보다 보면 가끔 정치 관련 이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 곤란해 하는 출연자를 보게 된다. '처음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기로 하고 출연하기로 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출연자를 볼 때가 있다. 특히나 대중에게 공공연한 편파 방송으로 인식되는 몇몇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출연자들이 더욱 조심을 하게 마련이다. 여당 편파 출연자는 야당 편파 방송 출연을 꺼리고, 야당 편파 출연자는 여당 편파 방송 출연을 꺼릴 게 뻔하다.
그렇다면 서로 반대되는 극단의 편파 방송들이 대중적인 인기인을 섭외하려고 할 경우, 피섭외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먹고 살기 위해서 벌어야만 하는 현실을 외면하고 혼자 살기에는 삶이 너무 버겁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보자니 특정 편향자로 비춰질까 두렵고. 그럴 때 최고의 차선책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고 출연'하는 정도가 아닐까?
예전에는 객관성의 부재로 투덜대는 정도였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기로 하고 출연하기로 했다'와 유사한 말들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 함의, 함축, 전제에 관한 생각.
'함의'란 말 그대로 어떤 말이 포함하고 있는 의미이다. 논리적인 포함 관계를 따져 보면 된다. '처음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기로 하고 출연하기로 했다'는 말의 함의는 '정치적 이슈를 제외한 다른 문제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출연자와 사회자는 다른 이야기는 다 해도 정치 관련 이야기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함축'은 어떤 말을 통해서 추론해 낼 수 있는 의미이다. 말 자체의 의미를 바탕으로 논리적인 계산을 하는 것을 넘어서 상황과 말의 관계를 통해 추론해 낼 수 있는 의미가 함축이다. '처음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기로 하고 출연하기로 했다'는 말의 함축은 '정치 관련 이야기는 나에게 하지 말라' 혹은 '정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법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다' 혹은 '정치 관련 질문에 대해서는 묵언수행을 하겠다' 등등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전제'는 어떤 말을 했을 때 그 말이 명제로서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다. '프랑스 왕은 대머리다'라는 말이 명제로서 성립하려면 '프랑스에 왕이 있'어야 한다. 프랑스가 왕정 국가가 아니라면 '프랑스 왕은 대머리다'라는 말은 성립 자체가 불확실한 공허한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처음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기로 하고 출연하기로 했다'는 말은 그 자체로 성립하므로 무언가를 전제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여러 상황에서 이런 말이 사용되고 있다는 말은 그 성립 여부를 의심할 수 없게 하므로 그 전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그 전제는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방송은 당연히 편파적이며 그럴 수 있다는 게 당연하다' 정도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처음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기로 하고 출연하기로 했다'는 말이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방송은 편파적인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어느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특정 편향이 없는 방송인이 편파 방송들을 두고 어느 방송에 출연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성립하는 사회. 편향, 아니 편파. 편파 사회. 민주 사회인지 편파 사회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사회의 한 국면은 아닌지. 섞어도 섞이지 않는 철과 진흙처럼 민주와 편파가 섞여 있는 건 아닌지.
'처음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기로 하고 출연하기로 했다'는 말처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말들 중에는 그 사회가 은연중에 전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회적 합의 내용을 드러내는 말들이 더 있을 것이다. 사회 언어학에 관심이 있다면 이런 말들을 더 찾아보는 일도 흥미로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