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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SAC Aug 27. 2019

블록체인, 오직 사실만을 말하다 Part.2

<- 이전 글 Part. 1 https://brunch.co.kr/@kosac/5


4. 의사소통과 사실성


 외부 사건에 관련하여 블록체인이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진술 사건의 사실성에 한정되며 진술 내용의 사실성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술 사건의 사실성이 진술 내용의 사실성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문제는 블록체인 기술의 결함으로 봐야 할까? 만약 우리가 다루는 진술이 어떠한 객관적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닌 경우라면?


 훔볼트는 언어의 기능을 즉 인지적 기능, 표현적 기능, 의사소통적 기능 등 세 가지로 분류하였는데, 하버마스는 그의 유명한 공론장 모델을 수립하기 위해 특히 언어의 의사소통적 기능에 주목하였다.주1)  앞서 문제가 되었던 외부 사건의 진술은 훔볼트의 분류에 따르면 객관적 사실 서술을 위한 언어의 인지적 기능에 해당한다.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이 사실을 말할 것을 기대하므로, 듣는 사람이 그것을 사실로서 인식할 수 있는 경우에는 언어 사용의 목적이 달성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실패한다. 반면 의사소통적 기능에 있어서는,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있는 그대로 말할 것을 기대하며 그 의견이 정확하고 솔직한지의 여부는 말하는 사람 외에는 확인할 수 없으므로, 듣는 사람은 진술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사람의 의견으로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진술이 전달되는 순간 자동적으로 의사소통 기능으로서 언어 사용 목적이 달성된다.


 이러한 언어의 의사소통적 기능이 어떻게 해서 사회의 도덕적 규범과 국가의 법을 제정하고 나아가 권력을 창출할 수 있게 되는지에 대한 하버마스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언어의 의사소통적 기능은 인지적 기능과 다르며 행위 방식의 구속력을 반영함으로써 규범 형성의 재료가 될 수 있다.주2)


 둘째, 도덕과 법은 상호 주관적으로 인정된 규범적 원리와 규칙에 의한 행위의 조정이라는 동일한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법은 도덕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제도적 수준의 구속력까지 갖추고 있다.주3)


 셋째,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공론장에서 의사소통적 권력이 생겨난다.주4)

공론장 이론, 다른 말로 의사소통에 기반한 규범과 권력의 창출의 원리는 우리에게 어떤 의의가 있는가?


 인류의 역사와 문명이 시작된 이래로 인간 사회를 운영하고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장치인 규범과 제도는 그것이 신이든 인간의 실천 이성이든 절대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최고의 권위로부터 내려오는 명령을 근본으로 연역적으로 만들어져 왔다. 그것이 국가 수준이든 국가와 별개로 존재하는 특정 민족 집단이나 공동체 수준이든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의 명령에 해당하는 율법이나 전승되어온 생활 규범에 의해 통치 또는 운영되는 사회가 있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규범과 제도의 정당성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단단한 토대는 사실상 사라졌다.주5)  하버마스는 실천이성의 자리를 의사소통적 이성으로 치환하는 화용론적 전회(pragmatic turn)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의사소통적 이성은, 실천이성처럼 국가나 사회 같은 거대한 주체에 귀속되지 않고, 구성원 사이에 상호 이해를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언어적 상호작용 속에 내재되어 있다.주6)  결과적으로 하버마스는 실천이성을 의사소통적 이성으로 성공적으로 대체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민권의 개념을 수용할 수 있고 국가는 물론 초국가적 수준까지 확장하여 적용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의사소통에 있어 중요한 것은 진술 내용의 사실성이 아니라 타당성이다. 그러나 타당성에 대한 판단은 상호 주관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의 진술은 듣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해져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법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을 의사소통적 권력이라 부르는데, 그 권력은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을 전제한다. '진술 사건의 사실성'을 항상 보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을 보장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블록체인을 통해 우리는 하버마스의 이상적인 공론장을 실현할 수 있다.



5. 블록체인, 어디에 쓸 것인가?


 흔히 블록체인의 합의 알고리즘과 탈중앙화로부터 영감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블록체인이 민주주의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선거와 다수에 의한 결정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 오해이다. 동일 사건에 대한 오직 하나의 진술만 허용하고 다른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 진술 내용에 대한 비판이 없이 자동으로 수용된다는 점을 근거로 오히려 누군가는 블록체인이 작동하는 방식은 전체주의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블록체인 자체는 민주주의적이지도 않고 전체주의적이지도 않다. 블록체인에서 합의의 주제는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 알고리즘이며 1인-1표가 아니라 사토시 나카모토의 표현대로 1CPU-1표(one-CPU-one-vote)

이다.주7)  또한 그 알고리즘이 합의하는 사안은 트랜잭션 내용의 타당성이나 사실성이 아니라 트랜잭션 자체의 적실성일 뿐이다. 사람의 사유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블록체인을 민주주의적이라거나 전체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컴퓨터 알고리즘이나 기계를 의인화하여 인간의 사회에 비유한 것에 불과하며 현실 사회의 민주주의나 전체주의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인간의 몸이 원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몸이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해서 우리의 의식과 행동이 물리 법칙에 따라 정해질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이런 식의 의인화를 통한 비유가 블록체인을 인간해방의 기술로서 이해하고 열렬하게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나 반대로 블록체인을 금융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반대하는 사람들에게서나 공통적으로 블록체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저해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낭비와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블록체인이 우리에게 산적한 수많은 문제들 중에서 어떤 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실제 어떻게 활용함으로써 그 문제들을 잘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과 연구가 그러한 오해들로 인해 가로막혀 있는 것이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블록체인이 보증하는 사실성의 본질에 대해 살펴보았다. 외부와 단절된 닫혀 있는 세계로서 블록체인은 하나의 자기 완결적 세계를 이룬다. 그러나 블록체인 외부의 사건이나 사물과 관련된 진술에 있어 블록체인이 보증할 수 있는 사실성은 진술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까지로 한정되며 진술 사건이 나타내는 그 외부 사건 또는 사물의 실재에 관한 것은 블록체인 세계에서 알 수 없는 따라서 보증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진술 사건의 사실성을 보증할 수 있다는 것은 상호 이해를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종류의 언어적 상호작용에서 핵심적인 가치를 가질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블록체인은 암호화폐 외에도 다음과 같이 다양한 응용에 핵심적인 기술로 활용될 수 있다. 


 첫째, 동의서, 계약서, 합의문, 통상조약 등 개인 또는 집단 사이의 약속을 기록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이 경우 블록체인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가장 강한 공증인(notary public)의 역할을 하게 된다.


 둘째, 토론이나 설문, 투표와 같이 집단의 의견 수렴을 통한 의지 형성과 의사결정 과정 전반을 매개하고 기록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이 경우 블록체인은 집단 의사결정의 정당성을 강화해 줄 것이다.


 셋째, 디지털 상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이나 집단의 문예, 논문, 회화, 미디어아트 등의 창작과 보관에 사용할 수 있다. 블록체인은 창작에 누가 얼마나 기여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저작권 보호에 있어서도 효과적인 수단이 될 것이다.


 그 밖에도 블록체인을 이용할 수 있는 분야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러나 블록체인이 인간에 의한 새로운 세계 창조에 해당한다면, 우리 모두가 절실히 원하고 있는 바를 실현하거나 또는 인류가 직면한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를 활용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마도 이어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지금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가?





주1) 위르겐 하버마스, ⟪진리와 정당화⟫, 윤형식 옮김, 나남 2008, p88 참조. 세 가지 기능이란, 생각을 형성하고 사실을 서술하는 인지적 기능, 감정의 동요를 표현하고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표현적 기능, 그리고 끝으로 무엇인가를 전달하고 반론을 제기하며 합의를 이끌어내는 의사소통적 기능을 말한다.

주2) 같은 책, p376. "도덕적 지식이 말하는 바는 바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이지 사물들의 상황이 어떠한가에 대해서가 아니다. 기술적 문장의 "진리성"이 의미하는 바는 진술된 사태가 "존립한다"는 것인 반면, 규범적 문장의 "올바름"은 명령된[내지는 금지된] 행위방식의 구속력을 반영한다."

주3) 위르겐 하버마스, ⟪사실성과 타당성⟫, 한상진﹒박영도 옮김, 나남 2000, p160. "분명히 도덕적 질문과 법적 질문은 동일한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어떻게 상호주관적 관계가 정당하게 질서지어질 수 있으며, 행위들이 정당한 규범을 통하여 서로 조정될 수 있는가? 어떻게 사회적 갈등이 상호주관적으로 인정된 규범적 원리와 규칙이라는 배경 위에서 합의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가? 그러나 도덕과 법은 이 동일한 문제에 대하여 상이한 방식으로 관계한다. 공통의 준거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구별되는 것은 무엇보다 탈인습적 도덕이 문화적 지식의 한 형식에 그치는 데 반해, 법은 그러한 성격 이외에 제도적 수준에서 구속력까지 갖고 있기 때문이다. 법은 상징체계일 뿐만 아니라 행위체계이기도 한 것이다."

주4) 같은 책, p209. "권력은 단순히 행동하거나 그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단합하고 타인과 조화를 이루어 행위하는 인간의 능력으로부터 나온다.(H. Arendt, Macht und Gewalt, München 1970, 45) 이와 같은 의사소통적 권력은 오직 왜곡되지 않은 공론장 속에서 생성될 수 있으며, 오직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의 훼손되지 않은 상호주관성 구조로부터 나온다. 의견형성과 의지형성의 장소에서 "자신의 이성을 모든 점에서 공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시민들의 거침없는 의사소통적 자유를 통해 '확장된 정신'의 생산력이 관철될 때 의사소통적 권력이 생겨난다."

주5) 같은 책, p29. "주체철학에 의해 파악되었던 실천이성의 내용이 파산한 이후, 그 내용을 역사의 목적론 속에서도, 유적 인간의 구성 속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성공한 전통이라는 우연한 기초에 의존하여 근거지을 수도 없다는 트릴레마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성법적 규범주의의 흔적은 이 트릴레마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것으로 보이는 대안, 즉 이성 일반에 대한 성급한 부정이라는 대안이 매력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그러나 인문과학의 영역에서 반직관적인 것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는 않으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해결책에서도 별 매력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나는 의사소통행위이론으로 다른 길을 제안하였다. 이제 실천이성의 자리에 의사소통적 이성이 등장한다."

주6) 같은 책, p30.

주7) Satoshi Nakamoto, '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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