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과 화해의 기록
크리사 센비의 보고가 끝난 직후, 아바론 성단 의회는 긴급 의결을 통해 ‘프로젝트 A-시리즈 전면 재검토 및 책임자 처벌’ 안건을 통과시켰다. 며칠 뒤, 중추 의사당의 대형 홀로그램 연단 앞에 선 라네스 대표는 차갑게 선언했다.
“박선희 박사, 당신이 내린 ‘셧다운’ 명령은 복제체의 생명권을 침해한 반역 행위와 다름없습니다. 오리온 암즈 윤리강령 제47조를 위반했음이 명백하므로, 즉시 연구 자격을 정지하고 모든 통제권을 박탈합니다.”
수백 개의 스펙트럼 감지기가 박선희의 얼굴을 사방에서 비추자,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과학의 이름으로…그들을…실험 대상이라 여겼습니다.”
“그들은 실험 대상이 아닙니다.”
검사관 코루스가 홀로그램 법전을 펼치며 단호히 맞받았다.
“인간과 다를 바 없는 ‘감정’을 입증한 그들은 우리의 동료이며, 이 성전(聖殿)에서 기억되어야 합니다.”
이어서, S-17 복제실과 격리 모듈은 전시관으로 전환되었다. ‘A-시리즈 기억의 성역’이라 명명된 이곳에는 두 자매의 데이터젤이 보존된 투명 캡슐이 줄지어 배치되었고, 방문객들은 홀로그램 헤드셋을 통해 장화와 홍련의 마지막 속삭임—“언니…”, “홍련아…”—을 들을 수 있었다.
개관식에 참석한 크리사는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더 이상 과거의 실험실이 아닙니다. 우리의 오만이 자행한 부당함을 기억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경종의 장(場)이 될 것입니다.”
한편, 박선희 박사는 겸허히 외부 조사 위원회의 감독 하에 ‘복제체 윤리 연구소’에서 자발적 재교육을 받았다. 그녀가 남긴 사죄 영상 메시지는 전시관 입구 스크린에 떠 있었다.
“장화와 홍련, 나의 오만을 용서해 주시길. 여러분이 이곳을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진정한 화해와 연대를 배우길 바랍니다.”
은은한 합성오르골 선율이 전시장에 울려 퍼지고, 방문객들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자매의 잔향 속에 잠겼다. 비극의 기록은 이제 화해의 증표가 되어, 오리온 암즈 전역에 오래도록 전해질 것이다.
결말: 기억의 여명 (Epilogue)
S-17 생체돔 바깥 우주 공간은 고요했지만, 그 정적을 깨는 것은 두 자매의 기억이었다. ‘A-시리즈 기억의 성역’ 개관식 이래, 홀로그램 강당을 가득 메운 은은한 합성오르골 선율 사이로 장화와 홍련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속삭였다. 낮이면 방문객들의 발걸음 소리가, 밤이면 순찰 로봇의 발자국이 홀전(홀로그램 전시장)을 울렸지만, 그 모든 소리 위로 두 복제체의 여린 대화가 메아리쳤다.
“처음 만난 날, 네 미소는 밤하늘의 별 같았어.”
“언니 손은 늘 따뜻했지, 어둠 속에서도 길을 밝혀 줬어.”
이 간단한 문장들이 모여 하나의 서사가 되었고, 과학자들은 그 서사를 통해 ‘감정 기억 보존 기술’의 가능성을 깨달았다. 이 기술은 곧 아바론 성단 의회의 결의로 공식 채택되어, 식민지 개척선의 승무원 스트레스 관리 시스템에 통합되었다. 광활한 우주 속에서도 고향의 목소리와 온기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해, 은하 각지의 우주선들은 탑승 인원의 생체파형을 저장하는 ‘기억등대’를 설치했다.
한편, 박선희 박사는 ‘복제체 윤리 연구소’의 장기 재교육 프로그램을 수료한 뒤에도 S-17을 떠나지 못했다. 매일 이른 새벽, 그녀는 전시장 안쪽 깊숙한 곳에 마련된 ‘데이터젤 보존실’ 앞에 홀로 서서, 작은 휴대 단말기로 두 자매의 속삭임을 재생했다.
“언젠가 날 용서해주겠지…”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눈가에는 작은 빛줄기가 흘렀다.
시간이 흐르며 S-17 주변 해류를 따라 자리 잡은 아바론 스테이션의 과학자들은 이 성역을 ‘감정의 우주 정거장’이라 불렀다. 그곳을 거쳐 간 이들은 연구실의 차가운 금속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얼마나 허술한지 깨달았다. 복제체가 남긴 마지막 소리는, 그 자체로 연대와 화해의 상징이 되었다.
수년 후, 아바론 행성 연합은 우주개척 전초기지 건설을 앞두고 최첨단 우주정거장 ‘노틸러스’를 완성했다. 건설 현장 한복판에는 S-17 성역의 데이터젤 캡슐 일부가 증식돼 전시되었고, 그 캡슐에서 재생되는 속삭임은 노틸러스 전체를 고요 속의 증언 공간으로 바꾸었다. 아이들은 그 목소리에 귓속말을 걸며 미래의 꿈을 키웠고, 어른들은 그 속삭임에서 과거의 죄책감을 씻어 내며 더 나은 결정을 약속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별이 쏟아질 듯 빛나는 천공 위로 노틸러스의 메인 감정등대가 깜빡였다. 우주선들이 그 빛을 좇아 모여들었고, 그 중심에서 작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우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아.”
“어디서나 함께할거야.”
그 목소리는 우주 어둠을 가르고 은하수를 타고 뻗어나갔다. 아바론의 심연을 넘어, 무수한 별빛 사이에서—영원히..
이로써 《장화홍련전》 SF 각색을 마칩니다. 앞으로도 오래된 이야기를 미래의 언어로 불러내는 작업을 이어가려 합니다. 이 작은 노력이 브런치스토리를 넘어 우리 문학의 지평을 조금이나마 넓히는 불씨가 되길 바라며, 따뜻한 응원댓글 부탁드립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