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필로 투표하는 나라 일본

아날로그의 나라 일본 투표소 풍경 관찰기

by KOSAKA

내일7월20일은 일본 참의원 선거일이다. 일본에 거주하면서 우리나라와 닮은 듯 다른 여러 문화들을 경험하고 있는데, 투표권은 없지만 일본의 이 선거문화는 상당히 독특한 듯 하다. 외견상 단순한 제도 차이를 넘어서, 사회적 관습과 책임의식을 드러내는 여러 상징과 절차로 가득 차 있다.


한국과 비교했을 때, 투표부터 개표까지의 과정에서 독특한 풍경이 나타난다. 후술하겠지만, 특히 지지후보자 이름을 연필로 기표하는 것은 전영록 선생님의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라는 명언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특히 세 가지 측면—투표권 엽서를 미리 받아 소지하고 가는 관습, 연필로 후보자의 이름을 기입하는 방식, 그리고 개표 현장에서 표를 하나하나 낭독하며 공개적으로 시연하는 절차—은 일본의 선거를 단순히 법적 절차가 아니라 일종의 ‘공동체적 의식’으로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신중하지만 일본은 이번 생에는 모바일투표를 도입하지 못할 듯 하다

첫 번째 특징은 바로 투표권 엽서(入場券) 문화다. 일본에서는 선거가 다가오면 각 가정에 우편으로 한 장의 엽서가 배달된다. 이것은 단순한 안내문이 아니라 법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유권자가 선거에 참여할 자격과 의무를 상징하는 표식이다.


엽서에는 선거구 번호, 유권자 고유 번호, 투표소 주소, 투표 가능 시간이 모두 적혀 있어, 마치 시험장 입장권처럼 유권자가 소중히 간직한다. 실제로 이 엽서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투표권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은 아니나, 관습적으로 대부분의 유권자가 반드시 지참하며 ‘참여 준비를 갖췄다’는 자부심의 표시로 여긴다.


한국에서는 주민등록증이나 신분증만으로 확인이 이루어지므로, 이런 실물의 ‘투표권 초대장’은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다. 유권자가 엽서를 가지고 투표소에 가는 모습은, 일본 선거문화가 절차적 형식과 상징성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예시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특징은 널리 알려진 대로 투표용지를 연필로 기입하는 관습이다. 일본에서 투표용지를 연필로 기입하는 관습은 단순한 절차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과거 문맹률이 높던 시절, 손으로 글자를 쓰는 것이 공식 기록의 유일한 방식이었고, 이는 전산화 이전에도 기록의 신빙성을 지키기 위한 제도적 선택이었다.


종이와 흑연 연필만 있으면 어디서든 투표를 진행할 수 있었기에, 별도의 전자 장비를 도입하는 대신 연필 보급과 관리를 통해 비용을 분산하는 실용적인 측면도 컸다.


손으로 한 글자씩 후보 이름을 써 내려가는 그 행위 자체가 유권자의 ‘결심 의식’으로 작용한다. 기계식 버튼 한 번의 선택보다, 매번 연필로 글자를 새기는 데 들이는 시간이 오히려 숙고를 강제하고, 투표에 임하는 주체성을 강화하는 셈이다.


반면, 이러한 인지적 부하가 일부 유권자의 참여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고, 잘못된 필기로 인한 무효표 발생 위험도 존재한다는 점이 현실적인 한계로 지적된다.


최근에는 전자투표 시범운영 등을 통해 연필 기입의 ‘숙고 의식’을 디지털 방식으로 재현하려는 시도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일본 유권자는 손 글씨가 주는 물리적 경험과 ‘나도 이 글자를 썼다’는 자부심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렇게 역사적 전통과 사회심리, 기술적 효율성 사이에서 일본은 균형점을 모색하며, 연필 한 자루로 이루어지는 소박한 의사 표현의 가치와 현대적 편의성을 동시에 고민하고 있다.


세 번째 특징은 개표 현장의 공개적 낭독과 시연 절차다. 일본에서 투표가 끝나면 개표소에 봉인된 투표함이 도착하고, 개표원과 참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개표가 시작된다. 이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표를 한 장씩 펼친 뒤, 개표원이 “아베 신조, 1표!” 또는 “자민당, 1표!”라고 크게 낭독하는 모습이다.


이 목소리를 듣고 확인 담당자가 표를 다시 확인하며, 정해진 구역에 쌓아둔다. 이러한 과정을 수백, 수천 표에 걸쳐 반복한다. 참관인은 개표대를 자유롭게 오가며 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표의 진위를 의심하거나 잘못 분류되었다고 판단하면 즉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낭독과 공개적 분류는 일본 선거에서 ‘절차적 투명성’을 체험하는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다. 한국에서도 개표 참관과 확인 절차가 엄격히 이루어지지만, 낭독 중심의 공개 시연 방식은 없으며, 보통은 분류기를 이용한 자동화와 검수를 결합해 속도를 중시한다. 일본은 이 과정에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유권자와 참관인이 ‘공개적으로 본다’는 의식을 매우 중시한다.


이처럼 일본 선거에서 투표권 엽서를 미리 집에서 챙겨야 하고, 투표소에 가서는 연필로 한 글자씩 후보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야 하며, 개표소에서는 모든 표를 큰 소리로 읽어 확인하는 과정은 언뜻 보면 ‘민주주의의 정수’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 일련의 절차는 시민 참여의 진정성을 드높인다기보다 과도한 절차주의와 형식에 얽매여 있는 면이 크다. 투표용지를 잘못 적어 무효표가 되거나, 연필 자국을 지우고 덧쓰기를 시도하는 사례도 적지 않아 엄격한 형식이 오히려 오류와 불신을 부추기기도 한다.


투표에도 형식 우선 관료주의가 작동하고 있다


투표권 엽서를 미리 보내는 방식은 유권자에게 다시 한 번 투표를 ‘권유’하는 효과가 있지만, 동시에 우편물 분실이나 주소 변경 등 현실적 장애를 고려하지 않아 일부 계층의 투표권 행사를 가로막기도 한다.


개표소에서 모든 표를 낭독하는 전통도 개표 지연을 불러오며, 최근에는 소규모 투표구에서조차 몇 시간이 걸리는 일이 흔하다. 이런 과정에서 “투표가 공정하게 검증된다”는 상징보다는 손쉬운 전자 개표 시스템 도입을 미루고자 하는 관료적 꼼수가 엿보인다는 비판도 나온다.


물론 일본 유권자들이 ‘내 손으로 직접 의사를 쓰고, 작은 목소리 하나까지 확인된다’는 감각을 중시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전통이 오랫동안 유지된 이면에는 변화에 대한 저항과, 기술보다 형식을 우선하는 관료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디지털 전환이나 자동화된 검증 기술을 도입할 만한 인프라와 인식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전통’을 내세워 개혁을 미룬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일본의 선거 문화는 그토록 강조되는 ‘책임 있는 시민의식’보다는 절차적 권위와 관습을 유지하려는 사회적 압력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공간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보통·평등·비밀·직접 선거 원칙 아래 수행된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일본에서 보이는 복잡한 형식주의는 민주주의의 본질적 가치를 체험하기보다는 형식 그 자체에 매몰되어 있는 면이 크다. 국가별 선거의 얼굴이란 결국 제도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뒤에 숨은 변화 의지와 실용성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달려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keyword
이전 22화남자의 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