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문학은 전통과 서구 문학 사이에서 갈등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습니다. 그 한복판에 서 있던 인물이 바로 모리 오가이입니다. 그는 의사이자 군인, 관료이자 문학가였으며, 일본 근대 문학의 토대를 다진 지식인으로 평가받습니다.
1862년 지금의 시마네현 쓰와노라는 작은 성시에서 태어난 그는 번주의 어의 집안 출신으로 일찍부터 한학과 의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근대화의 바람 속에서 그는 도쿄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체계적인 근대 의학을 배우는 한편, 괴테와 실러, 하이네 등 독일 문학과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독일 체류 경험은 그가 이후 문학에서 현실과 낭만, 전통과 근대의 긴장을 다루는 데 큰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귀국 후 그는 군의관으로서 일본 육군의 위생제도를 정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시기 그는 군위생 책임자로서 군의학적 기반을 마련했고, ‘위생’과 ‘국가’라는 키워드가 그의 인생과 문학 전반을 관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관료나 학자가 아니라, 문학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탐구하고자 했던 작가였습니다.
초기에는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사랑과 개인의 비극을 그린 번역·각색 작품과 단편들을 발표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무희(舞姫, 1890)》입니다. 독일 유학 중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서, 일본 청년 관료와 독일 무희 엘리제의 사랑과 파멸을 다루며, 근대 일본이 맞닥뜨린 서구와의 충돌, 개인의 욕망과 국가의 명령 사이의 갈등을 드러냈습니다. 이 작품은 일본 근대 문학사에서 사실주의적 자아 표현의 기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학에만 몰두하지 않았습니다. 군의관으로서 엄격한 책임을 다해야 했고, 국가에 봉사하는 삶과 개인의 예술적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습니다. 이러한 긴장은 그의 문학 세계를 더욱 복합적으로 만들었습니다. 1890년대 후반 그는 한때 창작 활동을 중단하고 번역과 비평, 문학 운동에 집중했습니다.
특히 당대 일본 문학계에서 자연주의 문학이 득세하자, 그는 그 흐름에 비판적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는 지나친 사실주의가 인간과 사회의 총체적 진실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보고, 역사와 전통, 윤리를 중시하는 문학을 주장했습니다.
1900년대 이후 그의 창작은 다시 활발해졌습니다. 특히 역사소설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남겼습니다. 《아베 일족》, 《오카네》, 《다카세부네》 등은 단순한 과거 재현이 아니라, 역사 속 인간의 운명과 윤리적 선택을 깊이 탐구한 작품들입니다.
《다카세부네》는 사형수의 마음속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생명과 죽음, 죄와 벌의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그는 일본 근대 문학에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적 가능성을 열었으며, 후대 작가들에게 중요한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의 문학은 철저히 인간의 내면과 사회적 조건의 갈등을 응시했습니다. 《무희》에서는 근대 국가와 개인의 사랑이 충돌할 때 파국이 불가피하다는 현실을 보여주었고, 《다카세부네》에서는 가난과 범죄, 제도와 인간성의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동시에 그는 서양 문학의 수용자이자 일본적 전통의 옹호자였습니다. 괴테와 입센을 번역하고 소개하는 한편, 일본 고전 문학과 역사적 인물을 재해석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서양 문학의 모방을 넘어서 일본의 길을 모색한다’는 메이지 지식인의 과제를 보여줍니다.
모리 오가이는 또 한 명의 문단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젊은 문학가들을 이끌며, 문학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를 강조했습니다. 자연주의가 인간의 본능과 사회의 어두운 면만을 강조할 때, 그는 인간의 의지와 도덕적 선택을 문학의 중심에 두려 했습니다. 이는 후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니자키 준이치로 같은 작가들이 인간과 예술, 도덕의 문제를 탐구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1922년, 그는 60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본 근대문학의 두 거인, 나쓰메 소세키와 모리 오가이는 자주 비교됩니다. 소세키가 ‘개인의 내면과 근대적 자아’를 치밀하게 묘사했다면, 오가이는 ‘국가와 역사, 윤리와 문학의 긴장’을 정면으로 다루었습니다. 소세키가 현실을 세밀히 그려낸 사실주의자라면, 오가이는 윤리적·역사적 맥락을 중시한 사상가적 문학가였습니다. 이 두 인물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함께 일본 근대 문학의 기둥을 세운 존재였습니다.
오늘날 모리 오가이는 단순히 한 시대의 문인으로 남지 않습니다. 그는 국가와 개인, 동양과 서양, 과학과 예술이라는 대립을 몸소 체험하고, 그 모순을 문학으로 형상화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기억됩니다. 그의 삶과 작품은 일본 근대가 겪은 근본적 갈등을 보여주는 동시에, 문학이 단순한 예술을 넘어 사회와 인간에 대한 성찰의 장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여전히 살아 있는 고전으로 평가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