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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책 Check 18화

[서평]『배가본드』를 읽고

이노우에 다케히코에게 보내는 편지

by KOSAKA

이노우에 다케히코 작가님께


처음 작가님의 작품 배가본드를 읽었을 때, 저는 그것이 검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그것은 ‘살아남는 법’이 아니라 ‘살아간다는 뜻’을 찾아가는 이야기였습니다.
무사 미야모토 무사시의 삶을 빌려, 인간이 어떻게 존재의 무게를 견디는가를 묻는 작품—그것이 당신의 배가본드였습니다.


당신은 전투보다 ‘고요’를, 승부보다 ‘성찰’을 그렸습니다. 피와 검이 가득한 서사 속에서도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무사시가 들판에 홀로 서서 바람의 방향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그는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되었고, 그때부터 비로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지요. 그 장면에서 저는 인간이 싸움의 끝에서 만나는 진실, 즉 “無의 고요함 속에 있는 生의 온기”를 보았습니다.


슬램덩크가 청춘의 순간을 불태운 작품이라면, 배가본드는 그 불길이 사그라든 뒤 남은 재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생의 기미를 그린 작품입니다. 당신은 이 만화에서 화려한 연출 대신 묵상하는 그림체를 선택했습니다. 붓 터치는 거칠지만 섬세했고, 선의 굵기는 인간의 감정처럼 흔들렸습니다. 그림이 마치 회화처럼 호흡했고, 대사는 적었지만 침묵의 무게는 책장을 덮은 후에도 오래 남았습니다.


무사시는 ‘강해지고 싶다’는 단 하나의 욕망으로 출발했지만, 그 길 끝에서 그는 ‘강함’이 아닌 ‘비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자신을 이긴다는 것은 곧 자신을 비운다는 것." 이 철학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울림이었고,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그린 ‘배가본드’라는 인물의 진정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는 끝없이 싸웠지만, 결국 싸움을 통해 싸움의 무의미를 이해한 사람이었지요. 그 여정이 우리 인생의 축소판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저는 ‘道라는 단어의 무게를 새삼 느꼈습니다. ‘길’이란 도착하기 위해 걷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며 스스로를 완성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무사시의 칼이 점점 날카로워질수록 그의 시선은 점점 부드러워졌고, 그가 세상과 싸우기를 멈출 때 비로소 세상은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붓끝에서 인간은 더 이상 전사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 되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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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무사시 자작 스케치

배가본드의 인물들은 모두 불완전합니다. 조조, 이토, 오츠, 다케조… 그들 모두가 자신의 상처 속에서 방황하지만, 그 상처야말로 살아 있음의 증거였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불완전함을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칠고 어두운 선으로 그려 넣어, 그 안에서 ‘인간’의 진짜 온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독자인 저는 그들의 고뇌를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작품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멈춤’의 미학입니다. 무사시가 나무 밑에서 흙을 만지고, 바람의 냄새를 맡는 장면은 단 한 컷의 정지화면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시간과 생각이 흘러갑니다. 그 장면에서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인간은 움직일 때보다 멈출 때 더 많은 것을 느낀다는 사실을.배가본드는 바로 그 ‘멈춤’의 미학으로 완성된 작품이었습니다.


이노우에 선생님,


당신은 검의 세계를 통해 ‘생의 철학’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철학은 문장으로 설명되지 않고, 그림의 침묵 속에서 서서히 피어났습니다. 그림 한 장, 시선 한 줄기, 여백 한 칸이 모두 언어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배가본드는 만화이자 동시에 시(詩)입니다. 그 안에는 ‘싸움’과 ‘평화’, ‘죽음’과 ‘삶’, ‘고통’과 ‘해탈’이 한 화면에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칼을 그리면서 동시에 인간의 마음을 그렸고, 그것이 이 작품이 단순한 무협 서사가 아니라 인간학으로 남는 이유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며 문득 제 자신의 싸움을 떠올렸습니다. 글을 쓰는 일도 어쩌면 ‘끝없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문장을 쓰려다 부딪히고, 그 문장에 내가 상처받고, 결국은 비워내는 순간에야 조금의 평화를 얻게 되지요. 그때마다 저는 당신의 무사시를 떠올립니다. 칼을 쥐고도 싸우지 않는 사람, 그것이 진짜 강자라는 사실을.


배가본드는 미완의 작품이지만, 저는 이미 완결을 본듯한 느낌입니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끝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로부터 얻은 사유의 깊이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보여준 것은 결말이 아니라 ‘과정의 진실’이었고, 그 여정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道’를 찾게 됩니다.


작가님의 붓이 멈춘 자리에서 저는 여전히 배움을 얻습니다. 그림은 정지했지만 의미는 계속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 확장의 한 파편으로, 당신의 작업에 감사와 경의를 전하고 싶어 쓴 작은 편지입니다.


한글날에 이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일본어로 그린 세계를, 한국인인 제가 읽고 다시 제 언어로 옮깁니다.
그것이야말로 언어와 예술이 서로를 이어주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 믿습니다. 당신의 그림이 내게 칼처럼 다가왔고, 동시에 빛처럼 남았습니다. 그 빛에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인사드립니다.



당신의 독자이자, 동시대의 글쓰는 사람으로부터.

KOSAKA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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