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키디데스의 함정과 한국의 선택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단순한 전쟁 기록이 아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패권을 두고 30년 동안 맞붙은 전쟁을 다루지만, 그가 탐구한 것은 무기나 전투가 아니라 인간과 권력의 본성이었다. 그는 종교적 설명을 배제하고, 인간의 행동을 두려움, 이익, 명예라는 세 가지 동기로 분석했다. 신의 의지가 아닌 인간의 욕망이 역사를 움직인다는 그의 통찰은 이후 2천 년 넘게 국제정치 현실주의의 근간이 되어왔다.
투키디데스의 시선은 비극적이다. 그는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한 불신과 경쟁이 어떻게 전쟁을 낳고, 문명을 무너뜨리는지를 냉정하게 기록했다. 그가 남긴 문장 “강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약자는 감내할 수밖에 없는 일을 감내한다”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출발점이자, 인간 조건의 비극을 압축한 표현으로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이 책에서 파생된 개념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이다. 신흥 강국의 부상은 기존 패권국의 불안을 자극하고, 그 불안은 갈등과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구조적 긴장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가 눈부신 해상무역과 군사력으로 급성장하자 스파르타는 자신의 질서가 위협받을 것을 두려워했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의 성장과 그로 인한 스파르타의 공포가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썼다.
오늘날 이 구도는 자연스럽게 미·중 관계에 대입된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를 설계하고 유지해온 패권국이다. 자유무역 체제, 금융 질서, 군사 동맹을 통해 ‘스파르타적 안정’을 구현해왔다. 반면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며, 기술·경제·군사 전반에서 미국을 위협하는 ‘아테네적 신흥 강국’으로 부상했다. 남중국해, 대만해협, 반도체 공급망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투키디데스가 묘사한 구조를 현대적으로 재현한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핵심은 단순히 강대국의 충돌에 있지 않다. 투키디데스는 전쟁의 논리를 해부하면서도, 그 파괴가 불러오는 문명의 붕괴까지 동시에 기록했다. 아테네는 제국의 오만과 과잉 팽창으로 스스로를 소모했고, 스파르타는 승리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 결과 고대 그리스의 황금기는 막을 내렸다. 그는 전쟁의 필연성과 그에 따른 파멸을 병렬적으로 기록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구조적 반복을 경고했다.
그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투키디데스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그것이 타인에게 두려움을 낳으며, 그 두려움이 다시 공격성을 불러온다”고 보았다. 이 순환은 개인의 차원에서든, 국가의 차원에서든 쉽게 끊기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은 단지 제도나 세력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심리의 연속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고대의 사건을 넘어 인간 사회의 영속적 병리학 보고서에 가깝다.
그런데 이 거대한 서사 속에서 종종 간과되는 것이 있다. 바로 강대국의 그림자 아래에서 살아남은 중간 세력들의 전략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결만큼이나 주목해야 할 사례가 바로 시칠리아의 도시국가 시라쿠사다. 아테네는 세력 확장을 위해 시칠리아 원정을 단행했지만, 시라쿠사는 지역 세력과의 연대와 외교적 균형을 통해 아테네군을 완전히 격퇴했다. 이 전투는 단순한 지역전이 아니라 제국의 야망을 꺾은 전환점이었다. 시라쿠사는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지렛대 삼아 스스로의 생존 공간을 확보했고, 이는 ‘지정학적 기술’의 고전적 사례로 남았다.
이 사례는 오늘날 한국의 외교 환경과도 맞닿아 있다. 한국은 미·중 경쟁의 최전선에 서 있다. 안보는 미국 동맹에 의존하고, 경제는 중국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순간, 다른 한쪽의 압박이 즉각적으로 가해진다. 그렇다고 중립을 선언한다고 해도 안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균형을 능숙하게 활용하는 전략적 유연성이다.
시라쿠사가 지역 동맹과 스파르타의 지원을 절묘하게 결합해 아테네를 물리쳤듯, 한국 역시 미·중 경쟁 구도 속에서 다자협력과 기술동맹, 지역 네트워크를 활용해 자율적 공간을 넓혀야 한다. 예를 들어, 한미일 협력체제를 유지하되, 동남아나 유럽과의 경제 파트너십을 병행하며 외교적 균형추를 맞추는 방식이다. 지정학적 압력 속에서도 스스로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능동적 선택의 문제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은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며 전쟁의 불가피성을 경고하지만, 동시에 다른 선택의 가능성도 남겨둔다. 그는 “전쟁은 인간의 선택으로 시작되지만, 그 결과를 목격한 자만이 다음 선택을 달리할 수 있다”고 암시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읽히는 이유는, 그것이 과거의 비극을 현재의 거울로 바꾸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이 책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단순한 비관론이 아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라쿠사처럼 균형을 기술로 전환해 스스로의 길을 설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투키디데스의 텍스트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고발하면서도, 동시에 그 어둠을 통찰로 바꾸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전쟁은 반복되지만, 이해와 절제는 인간만이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그래서 단순한 고대의 전쟁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반복을 경고하는 정치철학서이자, 오늘날 한국이 미·중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방향을 택해야 하는지를 되묻는 현재형의 질문이다. 역사는 강대국의 이야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라쿠사처럼, 때로는 작은 나라의 현명한 선택이 역사의 향방을 바꾸기도 한다. 한국이 바로 그 가능성을 증명할 수 있을지, 지금 우리 시대의 투키디데스가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