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로 번영을 연장한 제국, 신뢰를 잃으며 쇠퇴의 길로
레이 달리오의 『빅사이클』은 세계 경제의 흐름을 국가 단위의 부채 사이클로 설명한다. 그는 한 나라의 흥망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채의 축적과 통화 신뢰의 변화에 따라 일정한 순환을 반복한다고 본다.
초기의 제국은 근면과 절약을 기반으로 부를 쌓지만, 번영이 지속되면 신용이 팽창하고 부채가 누적된다. 경제는 외형적으로 성장하지만 실제 생산성은 정체되고, 결국 부채 상환 능력을 잃은 시점에서 위기가 찾아온다. 네덜란드, 영국, 미국으로 이어진 패권의 이동이 모두 이 패턴을 따랐다고 달리오는 말한다. 그가 제시한 ‘빅사이클’은 단순한 경기순환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재정·정치·사회 구조가 함께 흔들리는 거대한 파동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최근의 미·중 관세전쟁은 단순한 무역분쟁이 아니라 부채로 유지되어온 미국 경제의 구조적 피로를 드러내는 사건이다. 팬데믹 이후 미국 정부는 막대한 재정지출로 경기를 유지했고, 그 결과 연방정부의 부채는 사상 최대 규모로 불어났다. 연준의 금리 인상은 인플레이션을 잡는 대신 이자 부담을 더 키웠다. 국채 발행은 늘어나지만 세수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민간 부문 역시 높은 금리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고 있다.
달리오의 틀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은 제국의 사이클이 후반기에 접어들었다는 신호다. 생산성 향상이 정체되고, 신용 팽창이 지속되며, 정부는 외부 문제를 명분으로 내세워 내부 문제를 미루기 시작한다. 중국을 향한 관세 인상, 반도체·인공지능 기술의 수출 제한, 생산기지의 국내 회귀를 강조하는 ‘리쇼어링’ 정책은 모두 이런 구조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은 이미 재정적으로 한계에 다다랐지만, 외부 경쟁자를 견제함으로써 일시적 정치적 결속과 산업적 보호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달리오가 강조하듯 부채는 결국 경제 시스템의 신뢰 문제로 귀결된다. 부채를 계속 늘리면 언젠가 통화의 가치와 국가의 신뢰가 함께 약화된다.
달리오는 역사상 모든 패권국의 흥망이 통화의 신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분석한다. 네덜란드의 플로린, 영국의 파운드, 미국의 달러가 세계 경제를 지배했던 이유는 단순한 군사력이나 경제 규모 때문이 아니라, 그 화폐에 대한 국제적 신뢰 덕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은 세계 최대의 채무국이 되었고,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는 점차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브릭스 국가들이 자국 통화로 무역을 결제하려는 움직임, 중동의 일부 산유국들이 원유 거래에서 위안화를 사용하는 사례는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신호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금융의 중심이지만, 재정건전성과 정치적 합의가 흔들리면 달러의 위상도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달리오가 말한 ‘사이클의 말기’에서는 국가가 세 가지 선택지 앞에 선다. 첫째, 긴축을 통해 부채를 줄이는 방법. 둘째, 디폴트를 선언해 시스템을 재설정하는 방법. 셋째, 통화 발행을 통해 부채를 화폐화하는 방법이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국가는 세 번째를 택했다. 돈의 가치를 떨어뜨려 빚을 줄이는 것이다.
미국 역시 같은 길을 걷고 있다. 팬데믹 기간의 대규모 통화 공급, 양적완화의 장기화, 인플레이션 압력은 모두 부채 문제를 덮기 위한 결과다. 하지만 통화 가치는 결국 신뢰로 유지된다. 달러의 신뢰가 약화되면 미국은 더 높은 금리를 유지해야 하고, 이는 다시 부채 부담을 가중시킨다. 이런 악순환은 달리오가 지적한 사이클의 핵심 구조다.
지금의 관세정책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외부로 시선을 돌리려는 조치에 가깝다. 공급망 재편과 보호무역은 정치적으로는 효과가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을 자극하고 소비자 부담을 높인다. 단기적 안정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재정 압박을 더 크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달리오의 분석에 따르면 제국의 몰락은 외부 전쟁이 아니라 내부의 균열에서 시작된다. 부채가 늘어나면 사회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정치적 양극화가 확대된다. 정부는 합리적 조정보다 단기적 인기 정책에 의존하게 된다. 지금의 미국 사회는 이런 구조적 불안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대선 정국은 극단적인 진영 대립으로 흐르고, 재정정책은 당파적 이해에 따라 움직인다. 달리오의 틀로 보면, 관세전쟁은 내부의 분열을 잠시 덮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네덜란드가 해상 패권을 잃기 전 영국과의 전쟁을 선택했고, 영국이 식민지 제국의 위기를 맞을 때 해외 전선을 확대했던 것처럼, 미국도 지금 중국과의 경제전쟁을 통해 내부 문제를 외부 경쟁으로 전환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이클의 흐름을 되돌리지는 못한다. 부채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정치적 분열이 심화되면, 국가의 체력은 점점 약화된다. 미국이 진정으로 직면한 위기는 중국의 도전이 아니라, 자국 내 재정 구조의 불안정과 통화 신뢰의 약화다. 패권의 지속 여부는 군사력보다 재정과 통화의 안정성에 달려 있다.
『빅사이클』은 이 단순한 원리를 반복적으로 상기시킨다. 한 나라가 부채로 번영을 연장할 수 있는 기간은 유한하다. 관세전쟁이나 기술통제 같은 정책은 그 한계를 늦추는 임시방편일 뿐이다. 미국이 생산성과 혁신 능력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달리오가 말한 사이클의 하강 국면은 더욱 가속될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오늘의 국제정세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패권국이 자신의 부채 구조를 감당할 수 없을 때, 세계는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가. 『빅사이클』은 그 질문에 대한 구체적 데이터를 제시하며, 지금의 미국이 그 주기의 마지막 단계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